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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스티븐 킹인가? 『해가 저문 이후』를 덮은 이후. 본문
스티븐 킹이 2008년에 쓰고, 민음사 픽션 브랜드 황금가지에서 2012년에 펴낸 단편소설집 『해가 저문 이후』는 세련된 개정판 표지를 얻지 못한 탓에 쏟아지는 신간에 파묻힌 명작 중 하나이다. 여름밤 함께 읽을 호러를 고르다 찾았는데, 책을 덮고 나니 오싹하기보단 감탄할 뿐이다. 이야기를 쓸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스티븐 킹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아내 타비타 킹의 격려로 《캐리》를 완성하고 그 소설이 히트하자 단번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데뷔한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 크게 흥행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 킹의 이름에 익숙하다. 영화화된 작품으로는 《캐리》, 《그것》, 《미저리》, 《샤이닝》, 《쇼생크 탈출》, 《미스트》 등이 있으며 아마 당신도 한 편 정도는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운 좋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그를 알고 있다면 크나큰 오해이다. 스티븐 킹 공식홈페이지(클릭)의 WORKS 페이지를 보라. 그는 1963년부터 2024년까지 쉬지 않고 매년 글을 발표해왔다. 경이롭다 못해 징그러울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다. 작가 이전에 직업인으로서 존경스럽다.
『해가 저문 이후』에는 총 열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마지막 '선셋 노트'는 독자에게 직접 건네는 이야기로 소설은 아니다). 열세 편에 대한 소개와 한줄평을 정리해보려 하니, 혹시나 『해가 저문 이후』를 다 읽지 못했다면 일단 '뒤로가기'했다가 나중에 이어서 읽기를 추천한다. 절대 자신이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면 마음껏 스크롤하시라.
1. 윌라 Willa / ★★★★
Originally published in December 2006 edition of Playboy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그들이 타고 있던 열차를 교체하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철도역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어쩐지 새 열차는 절대 올 것 같지 않다. 데이비드 샌더슨은 그의 약혼녀, 윌라가 역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근 마을로 그녀를 찾으러 떠난다. 그는 동네 싸구려 카바레에서 그녀를 찾지만 그곳 손님들이 그 둘을 그저 무시하는게 아니란 걸 알아차리자 그제서야 그들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데···.
윌라의 말을 듣고 거울에 비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순간, 첫 페이지부터 다시 훑게 된다. 그제야 잠시 머무는 철도역에서 왜 늘 하던 질문과 대답이 생겼는지, 기차가 탈선했는데 왜 알츠하이머와 암에 걸린 헬렌 말고는 다친 사람이 없는지, 데이비드의 고함에 왜 늑대가 똥까지 한 덩이 싸며 도망쳤는지 퍼즐이 맞춰진다. 충실하게 단서를 남겼던 작가의 배려가 돋보인다. 짧은 분량에서 분위기와 캐릭터, 사건 모두 챙긴 완성도 높은 소설이다. 다만 사건이 벌어진 와이오밍 주는 Amtrack 여객철도가 다니지 않는 지역이라 처음부터 갸웃하며 읽기도 했다. 미국은 철도강국이지만 그만큼 노후 시설이 많아 교통사고가 잦다고 한다. <윌라>는 2006년 12월 처음 발표되었는데 이후 실제로 2008년 9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채스워스에서 25명이 사망하고 135명이 부상을 입은 열차 충돌 사고가 벌어졌다. 스티븐 킹은 그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질문: 철도역에 남아있던 다른 승객들은 왜 그들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보류시켰다는 착각이 위안을 부를 때도 있다. 가능성을 뺏기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판단을 유보하고 진정한 내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한줄평:함께 춤추고 싶은 상대만 있다면 영원마저 견딜 만해.
2. 진저브래드 걸 The Gingerbread Girl / ★★★★★
Originally published in July 2007 edition of Esquire magazine.
<진저브래드 걸>은 끔찍한 상실로 괴로워하는 에밀리의 이야기이다. 그 사건 후 에밀리는 남편과 집을 떠나 공항까지 달려간다. 위안을 찾던 에밀리의 달리기는 그를 플로리다 걸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버밀리온키의 가장 외로운 길을 달린다. 에밀리는 매일 열심히 뛰지만 어느 날 그만 피커링이라는 남자 집의 진입로를 들여다보는 실수를 저지른다. 피커링 역시 버밀리온키에서의 사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그가 데려오는 젊은 여성들은 어떤 결말을 치르고 만다. 에밀리가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인가?
『해가 저문 이후』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 중 하나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진다. 이 작가가 누구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몇 문장만으로 그가 겪은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차고 넘치게 드러내는, 압축적인 표현에 반했다. 또한 개인에게 닥친 희비극과 상관없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잘 드러난 문장도 좋았다.
p.56 그건 좋지만 에밀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침대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은 절대 아니다. 더 이상 부질없는 심폐소생도 싫고, 911에 악을 쓰며 애원하는 것은 물론, 목소리 좀 낮추세요, 부인.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따위의 핀잔을 듣고 싶지도 않다.
p.117 당연히 두렵기도 했다. 결투 중인 두 사람이 위험한 국면에서 느낄 법한 그런 두려움이다. 그녀가 예상 못한 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바다로부터 안개가 밀려들어 왔다. 진녹색의 물이 해변으로 달려와 하얗게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물고기들도 물속을 달리는지 펠리컨 한 마리가 열심히 포식의 향연을 즐겼다. 날개를 접고 물 속으로 뛰어드는 새의 실루엣도 보였다. 다른 펠리컨들은 밀려드는 파도 위에 조각처럼 꼼짝 않고 섰다가 고개를 까딱여 그녀를 지켜보았다. 왼쪽 하늘에서는 오렌지색의 태양이 따분한 시선으로 지상을 내다보았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전부 제각각인 것도 좋았다. 에밀리와 남편 헨리, 아버지 러스티 잭슨, 미친 피커링이 서로 어떤 관계가 되는지는 그들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고 또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는다. 또한 꼼짝없이 맞이할 결말로 쫓기듯 달려가다가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장면에서 시원한 해방감을 얻었다. 독자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이야기꾼에게 한바탕 놀아난 듯하다.
질문 1. 에밀리는 왜 달리는가?
에이미 사건이 벌어진 시공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목적지 없이 달렸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든 그 사건에 매몰되고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수동적인 회피에 지나지 않았다. 달리기의 목적을 찾고 나서야 에밀리는 "처음으로 기분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질문 2. 에이미에게 일어난 일과 피커링의 등장에 공통점이 있다면?
둘다 에밀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비극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을 가리고 쏜 화살에 맞는 것.
질문 3. 제목은 왜 '진저브래드 걸'인가?
2003년 호러 영화 《진저브레드 맨》(영화는 '브레드', 책은 '브래드'로 번역되었다)에서 제목을 따온 듯 하다. 연쇄살인마를 처형 후 화장한 잿가루가 우연히 제빵용 밀가루와 섞이며 진저브레드로 구워진다. 살인마의 영혼이 들어간 진저브레드는 제빵사를 죽이고 더 큰 진저브레드를 구워 몸집을 키우고 계속해서 사람을 죽인다는 B급 슬래셔 영화인데 장르 팬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모양. 그런데 영화에선 살인마가 '진저브레드 맨'인데, 왜 이 단편에선 에이미를 '진저브레드 걸'로 표현했냔 말이다. 그냥 어감이 좋아서 붙였나?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이 마음.
한줄평: 인과 없는 비극의 탈출구를 자기 안에서 찾을 때.
3. 하비의 꿈 Harvesy's Dream / ★★★★
Originally published in June 30, 2003 issue of The New Yorker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 하비가 아침에 일어나 더듬더듬 간밤의 꿈을 이야기한다. 재닛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불안하고 짜증이 치밀어 견딜 수 없다. 첫째 딸 트리샤가 꿈에 등장해 둘째, 셋째 딸 중 누군가 죽었다고 말했는데 하비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골칫덩이 제나, 막내 스테파니 중 누가 그런 일을 당한 걸까 궁금해하는 하비와 달리 재닛은 자꾸만 옆집 남자 프리드먼의 차가 찌그러진 것이 신경 쓰인다. 그때 기어코 전화벨이 울리는데···.
페이지를 대충 넘긴다면 많은 단서를 놓치게 될 정교한 단편이다. 대문호클럽에서 먼저 함께 읽은 덕분에 구멍을 메울 수 있었다. 재닛의 불안과 하비의 이상 징후가 합쳐져 분위기를 극적으로 끌고 간다. 비극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평온한 일상이다. 영리하고 깔끔한 한 편의 이야기에 스티븐 킹의 역량이 가득하다. 꿈이 현실을 예견하는 듯하지만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비극이 자신의 차례를 주장한다.
p.148-9 재닛은 더 이상 서 있을 기운이 없다. 그래서 부엌문으로 건너가 6월의 밝은 날을 내다본다. 저 밖의 대지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부부의 축소판이다. 너무도 조용한 아침이다. 잔디 위에 반짝이는 수십억의 이슬방울 좀 봐!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방망이질 치고 얼굴엔 식은땀이 흐른다. 하비에게 그만하라고, 그런 끔찍한 꿈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해 주고 싶다. 제나가 가까운 곳에 산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싶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는 제나, 주말 밤이면 주점으로 달려가 프랭크 프리드먼 같이 아버지 나이뻘 되는 인간들과 마셔 대는 제나. 나이를 매력으로 착각하는 제나.
질문: 재닛은 왜 꿈 얘기를 듣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가?
커다란 비극을 예감하는 순간 인간은 굶주린 맹수 앞에 던져진 듯 몸을 꼼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시작부터 마비되어 도망갈 수도, 이야기를 멈출 수도, 멈출 수도 없이 그저 먹잇감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한줄평: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꿈이 비극을 예견할 때.
4. 휴게소 Rest Stop / ★★★★
Originally published in December 2003 issue of Esquire
작가 존 다이크스트라는 릭 하딘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쓴다. 미스터리 작가 모임에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그는 잭슨빌에서 사라소타로 돌아오는 길에 절박하게 휴게소를 찾는다. 휴게소에는 다른 차 한 대가 더 있을 뿐이고 그 차를 타고 온 듯한 사람들의 소리가 여자 화장실에서 들려온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의 대화를 들어보니 명백히 가정 폭력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존 다이크스트라는 어떻게 그것을 멈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리가 안경잡이라니! 교제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의 외모가 우락부락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면 다른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 외모와 성격의 스테레오타입을 따르지 않아 신선하면서도 유용한 설정이었다. "사실 여자 화장실 밖에 있는 동안 다이크스트라가 상상한 건 덩치 큰 공사현장 노동자였다. 그런데 이자는 일주일에 세 번 골드짐 헬스클럽에 다니는 회계원처럼 생겼다." 또한 다이크스트라가 고속도로에서 토해버린 순간이 좋았다. 그는 결국 한낱 소심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열광하는 건 항상 강한 사람의 뻔한 승리가 아닌, 자신의 나약함에 맞서 싸우고 한계를 깨는 사람의 승리이다.
질문: 나와 다른 인물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한다. 이럴 때 나이면서 내가 아닌 인물, 또 다른 나를 창조하고 그 인물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항상 나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나는... 소설을 썼다 하면 영화가 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 스티븐 킹 같은···.
한줄평: 내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은 결국 나여야 한다는 것.
5. 헬스 자전거 Stationary Bike / ★★★
Originally published in 2003, Borderlands 5: An Anthololgy of Imaginative Fiction
의사로부터 그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리처드 시프키츠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실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다. 지루함을 덜기 위해 그는 지도책을 한 권 산다. 그리고 허키머(미국/캐나다 국경 마을)를 목표로 정한 뒤 뉴욕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을 따라 매일 자전거를 “탄” 거리만큼 표시한다. 또한 그는 자전거 앞의 빈 벽에 길의 풍경을 그려 정말 여행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허키머에 가까워질수록(적어도 그의 지도책에 표시된 거리에 따르면) 신체적으로 훌륭해지지만 그는 누군가 그의 일상적인 주행을 따라오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분량이 긴데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아 괴로웠던 소설이다. 여전히 궁금한 점이 많다. 건강검진 후 시프키츠는 의사의 걱정스러운 충고에 코웃음치지만 그가 레파토리로 드는 의학적 은유만큼은 마음에 든다. 그것은 바로 인체의 신진대사 과정을 살아있는 노동자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의뢰받은 그림만 그리던 시프키츠는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솟는 영감을 바탕으로 네 명의 노동자들을 그려낸다. 그는 무심한 몸의 주인을 대신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노동자들을 점차 깊게 사랑하게 된다. 그들이 과로하지 않도록 시프키츠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생전 처음으로 실내용 헬스 자전거를 구입한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운동을 시작한다. 그냥 자전거를 타기만 하면 지루하므로 지도책에 목표 구간을 설정한 뒤 주행한 거리만큼 이동했다고 표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전거를 설치한 지하실 벽에 목표 구간으로 가는 길을 그리고 이를 ‘투영화’라고 부른다.
그는 점차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시프키츠는 신진대사 노동자들의 시점에서 꿈을 꾸거나 지하실이 아닌 목표 지점인 허키머로 향하는 도로 위를 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시프키츠를 원망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시작했던 운동으로 평균 이상으로 시프키츠가 건강해지자 노동자들은 더 이상 도로(혈관)을 치우는 일에 고용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상상에 불과하며 그래야만 하지만 시프키츠의 현실에 자꾸만 그들의 흔적이 생긴다.
한 사람의 집념이 어떤 상황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적이며 환상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왜 시프키츠의 상상이 빚어낸, 그래서 그가 아는 것 이상의 대사나 행동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시프키츠를 원망하고 공격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설명하기 어렵다. 자기 최면에 걸릴만큼 강력한 운동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스스로 방어기제를 만들어 낸 것인지, 혹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지 않냐는 예전의 그가 속에 남아있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싶다.
한줄평: 상상친구가 현실로 넘어온다. 분노에 가득찬 채로.
6. 그들이 남긴 것들 The Things They Left Behind / ★★★
Originally published in the anthology, Transgressions
스콧 스털리는 그의 직장 라이트 앤드 벨 보험사가 있던 세계무역센터 붕괴 사건에서 살아남았다. 1년 후 보험사 사무실 칸막이 부스에 있던 죽은 동료들의 물건이 그의 아파트에 나타났다.
먼나라 미국의 사건이라지만 그 이후로 한국 역시 대참사를 여러 번 겪었기에 ‘생존자 죄책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를 독서 후 끝까지 혼란스럽게 한 것은 p.232의 “그리고 그 일들이 2002년 8월 말경에 일어났음을 기억한다.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우리 모두의 운명이 바뀌던 날.”이라는 문장이다. “2002년 8월 말경에 일어”난 일은 동료들의 물건이 스콧에게 나타난 일인데,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지고 우리 모두의 운명이 바뀌던 날”은 911테러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1년이라는 시차를 둔 두 사건이 한 문장에 합쳐져 있는 듯하다. 스티븐 킹이 잘못 쓴 문장인지, 해석이 잘못된 것인지, 내가 이해를 못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소설은 2001년 911테러 1년 후 홀로 살아남은 스콧의 집에 동료들의 물건이 등장하며 벌어지는 혼란을 다룬다.
저 헷갈리는 한 문장 때문에 헤매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집중해 읽었다. 처음 스콧은 그 물건들을 발견하고 못본 체 하거나 내다버리려 한다. 이때 떠오르는 어머니의 말이 재미있다.
p.250 언젠가 어머니가 한 말이 있다. 사내가 밑을 씻는데 휴지에 피가 묻어 나온다면, 30일 동안 어둠 속에서 똥을 누며 그저 나아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 예를 든 이유는 남자의 철학이란 게 ‘어떤 문제든 외면하면 사라진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스콧은 물건 주인의 가족들을 찾아 하나씩 돌려주기로 한다.
p.270 조만간 다른 물건들도 나타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가능성이 너무도 불쾌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닐까.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여긴 물건들, 중량이 있는 물건들을 돌려주는 문제라면 언제나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다. 장난감 선글라스나 루사이트 큐브 안의 쇠동전 같이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 해도······ 그렇다. 거기에는 분명 보상이 따른다.
질문: 왜 물건들이 스콧의 집에 나타났는가?
참사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기뻐할 수 없다. 마음껏 애도하기도 어렵다. 이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스콧은 자신의 역할을 찾고 뭔가 기여해야 한다. 희생자의 물건을 가족들에게 돌려줌으로써 그는 작별을 돕고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다.
한줄평: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손에 꽉 쥐는 순간.
7. 졸업식 오후 Graduation Afternoon / ★★
Originally published in Postscripts 10
부유한 남자친구의 코네티컷 교외 집에서 고등학교 졸업 파티를 즐기고 있는 젊은 여성은 핵폭탄으로 맨해튼이 파멸하는 것을 목격한다.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떠오르는 단편이다. 물론 실제 뉴욕의 맨해튼과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세계 저명한 과학자들이 모였던그 프로젝트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선셋 노트>에 따르면 스티븐 킹은 항우울제 금단 증상으로 꿈에서 이 장면을 보았고 픽션이라기보단 구술에 가깝게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한줄평: 영화 광고의 한 장면 같은 꿈 이야기.
8. N. / ★★
의사 찰리는 십여 년 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 존의 여동생 셰일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혼란스러워 하는 셰일라의 이야기와 함께 정신과 의사였던 존의 진료 기록이 담겨 있다. 존은 N.이라는 강박증 환자와 한 달간 상담을 가졌다. N.은 ‘셈’과 ‘접촉’, ‘배열’에 집착한다. 그 집착과 강박 때문에 공포에 질리고 일상을 살아가기 어려워진 N.은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역시 차례로 공포에 빠져들게 된다.
강박이 기생충처럼 옮겨다닌다. N.은 취미로 사진을 찍다가 애커먼 들판에서 으스스한 바위 일곱 개를 발견한다. 이상하게도 카메라로 바위를 보면 여덟 개인데, 눈으로 세어보면 여전히 일곱 개다. 그 순간 그는 바위를 짝수인 여덟 개로 맞춰야 세상에 이 괴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는 계속해서 바위를 여덟 개로 맞춘다. 이후 그는 짝수로 세고 일일이 만져서 확인하고 그 배열을 맞추는 데 집착하게 된다. 홀수가 악이고 짝수가 선인 세계에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임감과 공포에 짓눌리던 N.은 결국 자살하고, 이후 존은 그 바위가 있는 애커먼 들판을 찾는다.
감정이입도, 내용 이해도 부진했던 소설. 무섭지도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기묘한 분위기 묘사만큼은 충만했다.
한줄평: 여덟 단어로 쓰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텐데···.
9. 지옥에서 온 고양이 The Cat From Hell / ★★★
청부살인마, 프리랜서 킬러 핼스턴은 병들고 늙은 드로건의 이상한 요청을 받는다. 바로 얼굴 왼쪽과 오른쪽이 정확히 흑백으로 나뉜 고양이 한 마리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핼스턴은 당황하지만 드로건은 농담하는 눈치가 아니다. 어느 날 드로건의 집에 제멋대로 들어온 흑백 얼굴의 고양이는 누이 아만다의 사랑을 받아 집에 눌러앉게 된다. 그 이후 아만다, 아만다의 친구 캐롤린, 늙은 집사 게이지가 차례로 고양이의 습격을 받아 죽는다. 핼스턴은 그 말을 전부 믿지는 못했지만 일단 고양이를 죽이라는 임무를 받아들인다.
드로건의 제약 회사가 개발한 수면제 덕분에 그는 엄청난 부를 얻게 되었지만 그 수면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고양이 1만 5천 마리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 반반 얼굴의 고양이는 수많은 고양이를 대신해 복수하기 위해 온 걸까? 고양이는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느닷없이 핼스턴을 공격한다. 교통사고를 일으킨 와중에도 고양이는 귀엽고 장난스러우며 끔찍한 공격을 퍼붓는다. 핼스턴은 철천지원수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단순하고 징그럽고 강렬한 단편이다.
질문: 왜 고양이일까?
집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인간의 호감도 얻는 동물은 고양이 뿐이다. 맹수의 본능을 간직한 작은 암살자라면 역시 고양이를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줄평: 유연하고 느긋한 털북숭이에게 멈출 수 없는 잔혹한 열망이 빙의한다면.
10.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The New York Times at Special Bargain Rates / ★★
2층에서 샤워를 마친 앤은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제임스. 1층에서는 제임스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지만 그는 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제임스는 곧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이후 앤은 제임스의 예견이 두 번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 끝날 무렵의 통화에서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광고가 나오는 바람에 내용 전체가 헷갈리게 되었다. 내세로 떠나기 전의 제임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려 한 것 같은데 왜 뉴욕 타임스 광고가 나왔을까? 뉴욕 타임스를 구독하면 이런 초자연적인 이벤트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건지, 혹은 잘못 걸린 전화인지 궁금하다.
한줄평: 뉴욕 타임스 구독 이벤트 광고 전화가 저녁 8시 40분에 올 리 없잖아!
11. 벙어리 Mute / ★★★★
Originally published inPlayboy
오랜만에 성당에 온 모네트는 점심 식사에 가고 싶은 신부를 붙들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의 이야기는 고속 도로를 달리던 모네트의 차 안에서 시작된다. 어떤 남자가 진입로에 자신이 벙어리이며 태워달라고 쓴 푯말을 들고 서 있다. 모네트는 난생 처음으로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운다. 모네트는 차 안이 굴러가는 고해실 같다고 느끼고 벙어리에게 자신의 아내 바브가 저지른 일을 털어놓는다.
모네트는 두 번, 낯선 이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털어놓는다. 처음 벙어리에게는 아내 바브에 대한 분노와 고민을, 그 다음 신부에게는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말한다. 벙어리는 모네트가 가진 고민을 물리적으로 해결해 그의 마음 속 불안을 날려주고(돈도 얻게 해준다) 신부는 그의 죄에 가벼운 벌을 제시해 죄책감을 덜어준다. 서로 다른 조력자에게서 모네트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과정이 흥미롭고 또 통쾌하다.
질문: 벙어리는 왜 모네트의 차에서 가져간 성 크리스토퍼 목걸이를 그의 집에 돌려주었는가?
성 크리스토퍼는 가난한 여행자들이 강가를 건널 수 있게 돕던 인물이다. 어느 날 한 어린이를 업고 강을 건너다 유독 무겁고 힘들어 겨우 반대편에 닿을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가 의아해하자 어린이는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힌다. 예수를 모시고 강을 건넜기 때문에 여행자나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에 두는 성물 중 크리스토퍼의 것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모네트가 벙어리를 태워 길을 간 크리스토퍼라면 벙어리는 예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목걸이를 왜 돌려주었을까? 계속해서 남을 도우라는 격려, 내가 너를 알고 있다는 인정, 나의 뜻을 계속 품고 있으라는 명령일지도 모른다.
한줄평: 마태복음 6:4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이런 성경 인용 해보고 싶었다)
12. 아야나 Ayana / ★★★
Originally published in Issue 182, Fall 2007, of The Paris Review
남자의 아버지는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아야나라는 이름의 이상한 작은 소녀가 그의 병실에 찾아와 키스한다. 그것은 죽음의 키스가 아니다. 대신 그의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회복한다. 그는 이 기적을 갚아야 한다. 그래서 수년 동안 그렇게 한다.
묘한 이야기. 그는 오래전부터 흘러온 물결에 몸을 맡기고 기적의 매개자가 되는 데 흔쾌히, 혹은 거절하지 못하고 응한다. 대단한 일 같지만 나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질문: 왜 아버지 대신 남자가 기적을 갚아야 했을까?
그가 적임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그가 적임자일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야나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아마 그게 적임자의 자격이었을 것이다.
한줄평: 기적 그 자체보다 매개자의 지속이 더 기적 같은.
13. 아주 비좁은 곳 A Very Tight Place / ★★★★★
Originally Published in McSweeney's Issue 27 (May 2008)
커티스 존슨은 현재 진행 중인 법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이웃 팀 그룬왈드를 만나러 버려진 건설 현상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유인된 것이다. 그룬왈드는 전기 울타리를 쳐서 커티스의 사랑하는 개 벳시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만남은 존슨이나 그룬왈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커티스는 그룬왈드가 교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연락에 속아 난장판이 된 더킨그로브 빌리지로 향한다. 거기서 그는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빠지고 밤새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어릴 적 여름마다 아빠에게 이끌려 계곡에 갔다. 그런 곳에서 하루종일 놀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그 파란색 간이화장실에 가야했다. 그리고나면 그날밤 꼭 악몽을 꿨다. 좁고 흔들리는 더러운 간이화장실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그러다 결국 벽에 손을 짚거나 뒤로 넘어지고 만다. 익숙하지만 절대 편해지지 않는 악몽이다. 이 단편 덕분에 그 악몽이 다시금 선명하고 더 진화해버렸다. 망할 스티븐 킹. 읽는 내내 온몸이 불편하고 후각을 마비시키고 싶은 명단편이다.
질문: 그룬왈드는 왜 그런 최후를 맞이했는가?
이미 미쳐버린 그룬왈드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더러운 게이 마법사” 커티스가 주는 굴욕이다. 악당을 완성하는 것은 자신의 상상이다. 실제로 커티스가 했던 행동보다 그 상상이 자신을 극한상황으로 몰고 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한줄평: 스티븐 킹의 역량을 보여주는, 이 책의 두 번째 기둥.
아마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쓰면서 힘들었다. 도대체 이걸 왜 쓰고 있나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 싶다는 신호다. 갖은 핑계에도 이 글을 마무리한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에게도. 보상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8월 희영수 글방 프로그램 신청 시 <연속 등록 할인 30%> 옵션을 사용해도 좋다. 다만 사용 시 ‘해가 저문 이후’를 꼭 메모란에 남겨달라. 그렇지 않으면 누구신데 왜 30% 할인을 사용하셨는지 궁금해진 나의 연락이 가게 될 것이다. 이미 프로그램 신청 중인 분이라면... 나의 격정적인 오프라인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글방에 왔을 때 말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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