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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230102 월 / 하이테크C와 내수용 글씨체 / 긴개 본문
받아 쓰지 않은 말은 주워 담지 않은 곡식 낱알. 부족한 여백에 미처 쓰지 못한 정보를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처럼 아쉬워했다. 내게 공부란 쓰는 것. 들깨 같은 글씨는 거대한 수료증의 미세한 조각들. 모아놓고 보면 무수한 그라데이션이지만 등지는 순간 재가 되어 희게 날아간다.
PILOT사에서 1994년에 출시한 젤잉크펜 하이테크C(HI-TEC-C)는 청소년 시절 나의 토템*이었다. 연약하지만 우아한 파이프형 팁을 가진 이 펜은 바닥에 한 번이라도 떨어트리는 순간 생명이 끝나버리지만, 귀하게 다루기만 하면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나와 촘촘하게 연결되어 세밀한 움직임까지 구현할 수 있는 인체 공학적 기계와도 같았다. 잉크를 남김없이 쓴 검은색 0.3mm 펜만 모아도 작은 박스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애용했으며, 눈을 감고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손으로 느껴지는 무게만으로도 잉크가 다 차있는지 비었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물건이다.
나의 내수용 글씨체*를 가장 부드럽게 이끌어내는 유일한 펜 또한 하이테크C이다. 타인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닌, 일기를 쓰거나 필기할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이 글씨체야말로 나의 본질 중 하나이리라.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빠르게 많은 내용을 종이에 옮길 때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이 글씨체는 가까운 지인들이라면 단박에 알아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한 마디씩 덧붙이게 되는 독특한 꼴을 지녔다. 나야 당연히 이 글꼴을 사랑하지만, 어쩐지 내밀한 모습을 들키는 기분이 들어 대외적으로는 잘 쓰지 않게 되었다. 업무 상 알게 된 사람들에게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엉뚱한 것으로 보이도록 설정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다. 이 글씨체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내 오랜 치부마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여기서 오랜만이라는 것은 일기장을 펼친 두 페이지에 걸쳐 2021년의 일기 하나, 2022의 일기 하나, 2023년의 일기 하나를 썼기 때문에 덧붙인 표현이다. 그 세 일기는 나의 급격한 변화를 축약해 보여줄 수 있는 지표였다.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일기를 펼쳐 들고 순간순간 떠오른 생각들을 마구 쏟아내던 때의 나는 과거에만 남았다. 일기를 꼼꼼히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알려지는 것은 썩 좋지 않다. 많은 지인들이 자신도 몰랐던 도둑질의 잠재력을 발휘해 일기장을 훔쳐가곤 했다. 몇 번이나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한 뒤엔 생각을 곧이곧대로 기록하는 일을 멈추었다. 하이테크C와의 연결고리도 느슨해졌다. 일기 쓰는 일을 멈춘 이후엔 아무 펜이나 몇 번 쥐고 쓰다가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다.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도록. 훔쳐가도 속상하지 않도록. 아끼던 글씨체도 바꾸려 했다. 글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나 최근에 공부하겠다며 오랜만에 구매한 한 타의 하이테크C. 이 클래식한 펜 자루를 오른손으로 꼭 쥐다 보면 그렇게 나쁜 일은 다시없을 것만 같아. 이제는.
* 영화 <인셉션>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
* 편지나 판서 등에 사용하는 대외용 글씨체는 내수용보다 반듯해서 가독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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