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120 토 / 침울한 귀부인의 콧물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120 토 / 침울한 귀부인의 콧물 / 긴개

긴개 2021. 11. 27. 21:02


의자에 앉아 핸드폰 화면만 엄지로 밀고 당긴 게 벌써 한 시간째이다. 무기력한 이 모습은 바로 우울의 신호지. 우울하다고 행인에게 새총을 쏘거나 횟집 물고기를 훔치지 않는 고도로 사회화된 나를 칭찬한다. 술에 취해 운전하거나 사람을 괴롭히는 건 감형받지만, 우울하다고 그런 행동을 해선 안 된다. 행인들 주머니에 쓰레기를 넣어도 안 된다. 우울한데 좀 봐주면 안 되나? 안된다. 이럴 때일수록 귀부인의 몸가짐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귀부인. 나는 지금 귀부인.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성숙한 사람들은 요가를 한다. 오전 열시 반에 매트 위에서 다리를 머리 뒤로 넘기며 땀을 좀 흘렸다. 이럴 때일수록 식사도 신경 써야지. 맛있는 과일 샐러드에 치즈빵을 먹었다. 스스로 깨끗이 씻겨놓았다. 무릎에 앉은 고양도 뜨끈하지만, 여전히 손끝이 시리다. 참지 못한 눈물이 찔끔, 콧물이 주륵 흐른다. 어제 따고 반 남은 미지근한 와인을 몽땅 따랐다. 알콜은 좋은 친구가 아니지만, 하필 손 닿는 곳에 있던 걸 어떡해.

집에 틀어박혀 답이 나오지 않으면 동네 골목을 걷고 카페라도 다녀오면 좋았겠지만, 어제와 오늘의 미세먼지 수치가 오싹하게 치솟았다. 게다가 습도도 높다. 이런 대기질에 외출은 각종 스트레스를 수집하는 일일 뿐이지. 습하고 텁텁해 닦지 않은 입속 같은 바깥을 걷느니 답답해도 곳간 그득한 집에서 눈물 젖은 치즈빵이나 먹을래.

친구나 가족에게 괴로움을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다. 내 고민 탓에 그들까지 피로해질까 봐, 그래서 나를 귀찮게 여길까 봐 겁난다. 억지로 공감해주려 애쓰다가 결국 아무렇게나 조언을 건네고,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듣고 싶어 할까 봐 겁난다. 때문에 고민을 말할 때면, 내가 처한 앞뒤 상황을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하고 거기에서 어떻게 느끼고 판단했는지 잘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은 꽤 성공적이었다. 청자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데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스스로 문제를 잘 파악하고 해결책도 거뜬히 찾아낼 것처럼 보이게 해서 더 이상의 조언이나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껏 조언이나 위로를 받고 마음이 보듬어진 일이 없다. 나도 남의 슬픔에 온전히 공감해 본 일이 없고, 누군가 내 슬픔에 진정으로 공감해준다고 느낀 적도 없다. 그 상황과 감정을 나 아닌 사람이 알 리가 없다. 기쁨에 대한 응원은 살짝 엇갈려도 상관없지만, 슬픔에 대한 위로가 빗나가면 얼마나 뻘쭘하고 서로 괴로운지. 결국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내 문제들도 있긴 하다. 라섹 수술, 충치 치료, 뿌리 염색, 인터넷 설치, 비데 수리 등…

내 마음의 첫 번째 스폰서는 나여야 한다. 타인이 이 자리를 차지할 경우, 그에게 종속되거나 의존하게 될 위험이 있다. 나는 환자인 동시에 의사가 된다. 나에게 증상을 설명하면, 그걸 들은 내가 요가와 브런치와 새 자켓 등을 처방한다. 이 담당의는 자신의 환자에게 관대한 나머지 겨울옷을 지나치게 처방해 버렸지만, 환자가 진심으로 나아지길 바라고 있고 환자 역시 선생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숨이 끊기기 전까지 다양한 마음의 염증이 도지고 아물 것이다. 그때도 이 의사가 이 환자를 아끼고 환자는 의사를 믿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