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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1115 토 / 변 시인과 패터슨 / 긴개 본문
병 씨 성을 갖고 태어났더라면 꼭 등단해서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 하러 온 기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병 시인님-’하고 부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거다. 그러나 한국에 병 씨는 없으니 변 씨로 타협하겠다. ‘변 시인님-’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움찔움찔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싶다. 다른 성 씨는 재미가 없다. 나 대신 변 씨 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장래희망으로 시인을 고려해주었으면 한다.
주인공이 까마득히 높게 날았다가 로켓처럼 빠르게 콘크리트 바닥으로 주먹을 내리꽂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어쩌다 <패터슨>*을 보았다. 주인공은 패터슨, 버스 기사이다. 퇴근할 때 버스가 배트카처럼 변하지도 않고, 마지막에 내리는 승객을 연쇄 살인하지도 않는다. 놀라운 운전 실력을 살려 투잡을 뛰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23번 버스를 운전하고, 좋아하는 퍼세익 폭포 옆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흘러가는 강의 수면도 매일 엇비슷하다.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에도 눈에 띄는 물살이 있다. 바로 그가 매일 한두 줄의 시를 쓴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평범한 패터슨에게 한순간에 초능력이 생긴 듯 달라 보인다. 엇비슷하게 안온한 하루가 무한히 이어져도 거기에서 얻는 인상은 매번 새롭다. 시를 쓰는 행위는 흘러가는 매일 속에서 그를 깊게 붙들고, 내면과 세상의 통로에 특별한 렌즈를 더한다. 일상의 자극은 그의 내면으로 흘러들어가 언어로 조합된 다음, 다시 종이 위로 차원을 옮겨 간다.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주체는 외부의 자극이 아니다. 내면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무한의 수는 생이 끝날 때까지 헤아려볼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이 조용한 게임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51% 쯤 바랐던 취직을 하고 나니 다시 월화수목금이 시작되었다. 백수의 불안은 줄었지만 그만큼의 작업 시간을 반납해야했다. 설거지하고 빨래할 시간도 없는데, 그림은 언제 그리고 글은 언제 쓰고 또 겨울뜨개**는 언제 하나. 엇비슷한 매일에 특기할 만한 순간은 분명히 있고 그것이 눈을 반짝이게도 하지만, 결국 짬짬이 시간에 이뤄낸 성과는 겨울 아우터 쇼핑에 그쳤다.
패터슨의 홀로 즐기는 시작詩作은 워라밸 보장되는 동네의 유유자적 취미라고 비아냥 거리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불평 가득한 태도로는 패터슨은커녕 에세이 과제도 제 때 낼 수 없다. 외부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행복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은 불행을 예약해둔 것과 다름없다. 외부 자극과 나 사이를 즐겁고 안전하게 이어주는 내면의 범퍼를 시작詩作으로, 작문으로 만들 수 있다.
버스 기사는 사장이 시켜줘야 하지만, 시인은 그냥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뜬히 동시에 그 둘 다가 될 수 있다.
*짐 자무쉬(Jim Jarmusch)의 <패터슨 Paterson>(2016)
** 뜨개는 겨울이 제철이다.
(에세이 주제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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