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017 월 / 할머니 커뮤니케이터 / 긴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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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월 / 할머니 커뮤니케이터 / 긴개

긴개 2022. 10. 18. 00:24

 

 

 

 

 집에 돌아와 보니 문고리에 종이 가방이 걸려있다. 가방 속엔 새 양말 다섯 켤레가 들어있다. 아마도 자주 마주치는 마을 할머니 중 한 분일 것이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또래 친구는 사귀지 못했지만 매일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하늘 구경하는 할머니들과는 꽤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내 강아지 란마를 발음하기 어려워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부르는 할머니들. 저번엔 세주네* 할머니가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란마가 어떻게 알콩이가 되었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그 뒤로는 나도 종종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부르다 보니 역시 란마보다는 알콩이가 입에 착 감긴다.

 

 

  이전 동네에서도 그런 할머니들이 있었다. 집 앞 평상에 매일 식사 시간 전후로 모여 수다를 떨고 마늘을 까고 부침개를 노나 드시던. 그러나 그 동네 할머니들은 아무리 매일 인사를 해도 심드렁해하셨지. 혼자 사는 여자가 동네 할머니들과 안면을 터서 나쁠 것 없다는 계산적인 속셈으로 알은체를 해서 그랬을까, 이사 가는 날까지도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셨다. 꾸벅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횟수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으로 다 세어보고도 한참을 모자랐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정 나눌 틈이 없었나. 나는 할머니들과는 영 친해지는 재주가 없나 보지. 혼자 아쉬워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마을은 좀 다르다. 마을 어귀에는 참새들이 밤낮으로 뛰어노는 나무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 매일 같이 터를 잡고 뒹굴거리는** 할머니들이 있다. 별 기대 없이 인사했더니 우렁찬, 혹은 걸걸한 목소리로 반가워하신다. 나는 이분들을 각각 쿨매*, 세주네 할머니, 옥탑 할머니, 노인정 회장 할머니 등으로 구분해 기억하고 있다. 발레학원에 갈 때, 출근할 때, 란마 산책할 때, 놀러 나갈 때 이 중 누구든 마주치게 된다. 1층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으면 산책하던 할머니가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들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할머니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건 처음이다. 매일 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는 할머니들을 보면 신선이 사는 동네에 흘러들어온 기분이다. 

 

 

 칠월 즈음엔 마을버스를 기다리려 정자에 잠시 앉았더니 할머니 한 분이 팔에 그게 뭐냐고 꾸중 같은 질문을 했다. 허허 웃고 있으려니 다른 할머니가 로만 레인지도 그렇게 팔에 문신이 있다고 거들었다. 로만 레인지요? 그게 누군데요? 했더니 레슬링 선수라고. 알고 보니 정자에 모인 할머니들은 전부 레슬링의 열렬한 팬이었다. 로만 레인지** 잘생겼지. 갸 사촌 우서*도 레슬러여. 86번 채널에서 레슬링을 하루 종일 방영한다는 새로운 정보도 얻었다. 신선 같던 할머니들의 원동력 중 하나가 레슬링이었다니, 마을버스를 타고 덜컹덜컹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할머니들이 서로 저먼 수플렉스 하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우리의 우정은 이 새 양말 다섯 켤레에 담겨있다. 그중 하나는 남색 바탕에 빨간색 꽃게가 가득 그려져있다. 젊은이에게 어울릴만한 재미있는 무늬를 골라주신 걸까? 양말을 골라 봉투에 담고 문고리에 걸었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니 눈가가 시큰해진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선물하신걸까? 누군지 모르니 할머니 전부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 앞으로 정자 앞을 지날 때마다 양말 신은 발목이 잘 보이게 바지를 걷어야겠다는 다짐. 이렇게 고마운 분들 성함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네. 무심하고 건방진 나.

 

 

 발을 동동 거리며 하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드디어 오늘 아침, 정자에 계신 할머니들을 발견하자마자 신나게 달려갔다. 꽃게 양말도 일부러 신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고마운 분이 나를 생각해주셨을까, 반드시 어떤 보답을 하리라. 할머니! 그, 누가, 양말을! 문고리에, 새 걸, 양말을, 주셨던데! 하고 뒤늦게 몰아치는 숨을 헉헉 고르고 있는데,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깜찍하고 소중한 다섯 켤레의 양말은 이 마을 언저리에 있는 작은 교회 목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나눠준 것이었다. 여전히 꽃게 양말에는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담겨있을 테지만 내가 기대했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빈 초콜릿  통을 열어버린 아이처럼 허탈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세주 할머니는 계속해서 목사님 칭찬을 이어갔다. 아주 좋은 양말을 이 동네 여기저기 다 나눠주셨다고. 나도 새거 오늘 신고 나왔다고. 자세히 보니 옥탑 할머니 발에도 새 양말이 있었다. 그래, 우리는 커플 양말을 신은 사이가 되는 거지. 양말을 서로 선물하는 사이는 아닐지라도, 이 동네 사람만 신을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진 아주 가까운 사이인거지. 할머니들이 나를 끔찍이 생각해주지는 않더라도 너도 그 양말 받았냐고 반가워해주는 사이는 되는 거지. 그거면 차고 넘치는 거지.

 

 

 

 

 

*세주는 강아지 이름. 풀네임은 백세주. 술 백세주를 좋아해 그렇게 지으셨다고.

**문자 그대로, 목침 등에 머리를 베고 뒹굴 누워 노신다.

*매일 담배를 물고 쿨하게 인사하시는 할머니

**Roman Reigns 로만 레인즈. 미국 WWE 소속 프로레슬러. 

*The Usos 지미 우소와 제이 우소. 로만의 5촌 형제.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로만 레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