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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월 / 아슬아슬하고 좁아터진 나무집 (서울시립미술관 - 정서영 개인전 <오늘 본 것 What I saw today> 감상) / 긴개 본문
1024 월 / 아슬아슬하고 좁아터진 나무집 (서울시립미술관 - 정서영 개인전 <오늘 본 것 What I saw today> 감상) / 긴개
긴개 2022. 10. 25. 01:27
허리에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둘러싸고 노란 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유명한 덕수궁 와플집 옆으로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달콤한 냄새에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치열하고 침 고이는 광경을 발견한다. 승자들은 따끈한 와플이 든 봉투를 쥐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포근한 날씨에 몸이 풀린 나들이객들이 덕수궁 담벼락 앞에서 한 컷, 노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 컷, 예쁜 뜨개옷을 부여잡고 한 컷 바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다들 길을 막고 서있으면 빨리 미술관으로 갈 수 없다.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세워 집에 돌려보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 허리를 붙잡고 한쪽 발 끝을 애교스럽게 든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할머니가 무릎을 굽혀 그 포즈를 서둘러 핸드폰 카메라에 담는다. 신난 할머니들을 보니, 미술관에 오 분 일찍 가는 게 뭐 대수냐 싶다. 괜히 나도 그 가로수 허리를 붙잡고 친구에게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미술관에서 사고 싶은 책이 있대서 따라갔다가 겸사겸사 전시 하나를 관람했다. 정서영 작가의 <오늘 본 것 What I saw today>. 프런트에서 나눠주는 리플릿엔 별다른 설명이 없다. 때마침 큐레이터가 사람들을 모아 전시 해설을 시작했고 우리도 그 무리 속에 슬쩍 끼어들었다. 작가는 작품의 제목이나 해설을 경외하며 수동적으로 감상하기보다는 관람객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즐길 것을 권한다고 한다. 그 바람대로 작품들은 전시장 여기저기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다. 천장에서 작품을 비추는 조명도 마트 천장의 형광등과 흡사하다. 저녁 찬거리를 고르듯 나도 이리저리 작품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서른세 개의 작품 중 입구에 제일 가까운 것은 <전망대>이다. 네 개의 길고 얇은 막대 위에 직사각형의 나무집이 붙어있다. 평평한 판자 지붕 아래의 네 벽은 상단의 유리와 하단의 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하나에는 작은 아이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문이 나 있다. 바닥에서 그 문까지 오르내릴 수 있는 나무 사다리도 걸쳐져 있다. 나는 이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어른이 된 몸은 입구에서부터 구겨지며 어깨를 온통 긁힐 테니, 기억 속의 작은 나를 불러내 대신 들어가 보게 한다. 나무집 속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를 것이다. 판자와 유리로 만들어진 사각 프레임은 외부의 파노라마를 가로 세로로 조각낸다. 얇은 벽은 바깥의 소리와 빛을 거의 그대로, 그러나 어딘가 다른 진동과 명암으로 투과시킨다. 그 속에서 나는 몸을 조금 숨긴 채 평소보다 높은 시선으로 바깥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바깥에서도 좁은 나무집에 갇힌 나를 이구아나처럼 관람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관람하며 자신의 자리가 상대보다 안전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속에서는 갇힌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답답한 자유가 있다. 좁은 공간을 혼자 차지한 것만으로도 시간이 느려지고, 공기가 무거워지며 동시에 어떤 생각도 멋대로 해버릴 수 있다. 가령….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와 <목화밭>이 함께 놓여있는 장면도 좋았다. 두 작품이 놓인 공간은 다른 전시장에 비해 조도가 뒤죽박죽이었다. 천장의 조명은 비교적 어둡고 두 작품 자체의 조명이 매우 밝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는 카페에서 볼 법한 디저트 냉장고 형태를 한 희뿌연 유리장 속에 밝은 조명이 들어있는 설치 작품이었다. 그 속에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는 없었다. 하지만 제목을 읽고 나니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홍색 장식과 체리가 요란하게 장식된 동그란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는 사람과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동네 슈퍼 앞 냉장고 속의 옛날 아이스크림들. 어둠과 밝음이 얼룩덜룩 흩어진 전시장에 서서 잠시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이미지들을 오려 붙였다.
전시 리플릿의 안쪽 면에는 작품명과 위치, 재료와 크기 등이 정보 전달에 충실한 레이아웃으로 인쇄되어 있다. 바깥 면에는 전시와 관련된 작가 이외의 인물, 단체들과 그 역할이 쓰여 있다. 주최와 학예 총괄, 전시 총괄부터 시작해 홈페이지·도슨팅앱 운영, 수집 연구, 시설, 소방, 기계, 전기, 방호, 시공, 복원, 운송·설치, 영상 장비, 번역, 인쇄, 홍보물 제작설치, 프로덕션, 그래픽 디자인, 웹 아카이브 등, 전시 하나를 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과 담당자들이 이렇게나 많다. 기록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전시 이면의 수고들이 와르르 머리 속을 채운다. 동시에 이런 수고를 들여 전시를 열 만큼의 작가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하는 유치한 귀납적 추론으로 감상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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