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003 월 / 입사 일주년 기념사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003 월 / 입사 일주년 기념사 / 긴개

긴개 2022. 10. 4. 02:16





창 밖으로 내리는 비에는 차가운 악의가 있다. 나무 한 그루라도 주저앉혀야 속이 풀릴 것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따금 무거운 빗줄기가 바람에 떠밀려 꿀렁 휘어진다. 깜짝 놀란 가로등 불빛이 함께 들썩인다. 함께 사는 강아지는 왜 밤 산책이 미뤄지는지 충분히 안내받지 못했다. 답답한 표정으로 발치에서 조바심을 내다가 내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킁킁 코를 묻히며 참견하는 데도 나갈 기미가 없자 풀썩 드러눕는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제습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껐다 켰다. 그야말로 홀로 입사 일주년을 기념하기에 딱인 날씨다.

어쩌다 보니 오늘에 와 있다. 아빠는 내 팔의 문신을 볼 때마다 평생 취직 못 할 거라고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시월로 벌써 입사 일주년이 되었다. 아빠는 삼십삼 년을 근속한 회사에서 올해 퇴직했다.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회사에 다니는 날이 왔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아이도 없고 집도 없는 반푼이 어른의 근무 이력은 아빠의 이력보다 가벼울 것 같다. 오로지 자기 혼자 먹고살고 재미 보기 위해 버는 내 월급에는 처절한 희생정신도 없고 결의를 다진 청사진도 없으니까. 아마도 아빠가 벌어온 월급의 무게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

큰 결심 없이 쓰기 시작한 일주일 한 편의 에세이도 벌써 마흔여섯 편이나 모였다. 일 년 가량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 밤에 이마를 치며 모니터 앞에서 끙끙거렸다. 그렇다고 작년 시월에 쓴 글과 지금 쓴 글이 대단한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작년 글도 재미있고 최근 글도 재미있다. 섞어놓고 보면 어느 게 이전 글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모은 건 모은 거지. 아직 이 글들의 쓰임은 모른다. 이렇게 영원히 티스토리에 묻히게 될 수도 있다. 혹시라도 발견한 사람은 즐겨주길 바란다.

처음으로 꾸준히 한 곳의 직장을 다녀 보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앓던 한 주를 빼고는 일주일 한 편의 에세이도 전부 완성했다. 이사 후엔 발레도 네 달째 다니고 있다. 글을 쓰는 습관, 출근하는 습관, 운동하는 습관이 고루 갖춰지고 있다. 삼십 대의 나는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성실하게 살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전부 별생각 없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무런 각오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술술 살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편하고 재미있다. 동시에 언제까지 이런 구조의 생활이 가능할까 궁금하다. 내일을 위한 플랜 B는커녕 지금을 위한 플랜 A도 시원찮은 나날이 언제까지 균열 없이 이어질 수 있을까. 입사 일주년이 되면 그 답을 알게 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