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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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3 긴개

1010 월 / 이무기 발레리나 / 긴개

긴개 2022. 10. 11. 00:17

 

 

 

 

 

 

 열여덟 살짜리가 쓴 진로계획서 그 종이 쪼가리 어느 구석에 미래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으랴. 사회생활 데이터가 부족한 당시의 상상력으로는 공무원/회사원/선생님/자영업 이외의 직업군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외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결정은 상기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마치 제3세계로 망명하겠다는 선택처럼 비장하면서도 무책임한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 미술학원에 매달 45만 원가량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미지의 미래를 위해 오른쪽 어깨 근육을 혹사하는 동안 어떤 친구는 뜬금없이 발레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뜬금없기로서는 내가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피차일반이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모르던 고2의 눈에도 발레를 배워 돈을 버는 방법은 굉장히 험난하고 치열할 것만 같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미대를 졸업하면 그림을 그리고 팔아 돈을 벌거나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겠지만, 발레를 전공하면 발레 공연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돈을 버는지, 발레리나는 어디에 취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발레나 뮤지컬 등의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발레를 배우면 흥이 오를 때 어디에서나 발레를 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궁금증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친구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함께 울적해져 버릴까 봐. 사실 그렇게 친하지 않기도 했고. 

 

 그 친구를 오랜만에 떠올린 것은 올해 오월 초,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온 뒤였다. 이전에 살던 집에는 도보 삼 분 거리에 요가원이 있었다. 늦잠을 자더라도 지각하지 않았다. 땀을 많이 흘리더라도 금방 씻을 수 있었다. 춥고 더운 날이라도 가기 싫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만큼 가까워 빠지지도 않았다. 운동은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는 기준도 그때 세웠다. 덕분에 정 붙이기 힘든 동네를 견딜 수 있었다. 

 

 성실한 체육인의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이사한 뒤에도 바로 다닐 수 있는 요가원을 물색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핫요가나 플라잉요가는 요란스럽고, 인테리어가 낡거나 현란해도 싫다. 이전에 다닌 요가원이 참 수수하고 적당했던 것이다. 필라테스는 고문 기계라는 말을 하도 들은 탓에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다. 크로스핏이나 복싱도 다시 해보고 싶었으나 역시 갈길이 멀었다. 그때,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입 안에서 굴리는 맛마저 특별한, 발레.  고등학교 때 친구의 조막만 한 머리통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발레란 보드랍고 얄쭉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마치 달 위에서 걷는 사람처럼 몸을 가볍게 띄워 아름답게 팔다리를 뻗고 구부리는 우아한 활동. 그런 발레를 만약 내가 배운다면 어떨까? 핑크색으로 꾸며진 방에서 자랐을 법한 요조숙녀들이 질끈 묶은 머리카락과 타이즈 차림으로 클래식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 나를 합성하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발레는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어떤 운동을 하고 있을지 묻는다면 절대 실수로라도 답하지 않을 종목이었다. 어쩐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듯한, 혹여나 이런 상상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데 쑥스러워 머리통을 쓱 긁다 보니 속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배우면 더 멋지지 않을까? 사근사근 고운 느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발레를 할 줄 안다면 의외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까? 이거 엄청 괜찮은 생각이다. 하자. 하자. 한 번 해보자. 

 

 네 달 째 발레를 배우고 있는 지금은, 저 생각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안다. 발레는 파워다. 한쪽 발로 곧게 선 다음 나머지 다리를 옆으로 쭉 뻗어 위로 올리고 발 끝으로 뛰며 흔들리지 않게 착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코어와 허벅지 근육이다. 발레를 해서 곱고 우아하고 멋진 건 선생님이고 나는 악령에 빙의된 환자이다. 전신 거울을 통해 내 육체를 마구잡이로 조종하는 악령을 확인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감전된 허수아비가 괴로워한다. 나는 앞뒤 발의 순서를 헷갈려 얼떨결에 탭댄스를 추는 융복합 장르 개척자이자 절대 용이 되지 못할 발레리나이다. 

 

 재미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