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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919 월 / 가을밤 우유가 황금우유 / 긴개 본문
밤 아홉 시 즈음 깨닫는다. 출출하다는 것을, 그리고 뭔갈 먹기엔 늦은 시간이라는 것도. 해가 진 뒤에 간절해지는 음식은 대부분 기름지고 달고 짠 것들이다. 먹고 나면 금세 더부룩해진다.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맥주가 남아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두자. 여기서 굴복한다면 정해진 미래는 하나뿐이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맥주로 식도와 위를 식힌 뒤 빵빵해진 배를 눕혀 힘들게 잠들었다가 피곤이 배가 된 채 아침에 깨어나는 것, 그리고 어젯밤을 후회하는 것. 미래를 엿본 현명한 자는 요거트 하나, 이것만으로 굶주린 충동을 얼마든지 굴복시킬 수 있다.
확고했던 다짐은 밥풀로 붙여둔 메모지처럼 시간이 지나자 힘없이 나풀거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거트를 위장으로 한 숟갈씩 내려보냈더니 글쎄 다음엔 뭐가 내려올까 기대만 키운 꼴이었다. 밤은 더욱 깊었고 속은 속도 모르고 꾸르륵거린다. 책을 읽으려고 앉았는데 페이지가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눈은 같은 문단을 세 번째 훑고도 머리에 한 글자도 보내지 않는다. 에너지를 공급하면 이 컨베이어 벨트도 더 수월하게 돌아갈 텐데. 허기는 애꿎은 잠도 쫓아버렸다. 아무래도 이 밤은 쉬이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죄 없는 책을 쥐어뜯고 있는 와중에 작업실에 있던 정민 씨가 올라와 내가 앉은 의자 옆을 지나갔다. 물 한 잔 하러 나온 것인지, 화장실에 가려고 나온 것인지 모른다. 배고픔이 블랙홀처럼 다른 감각들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정민 씨가 건네는 말도 잘 들리지 않는다. 시리얼이 먹고 싶은데 우유가 다 떨어졌다고 중얼거리자 정민 씨가 뭔가 말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고 곧바로 그 대화를 잊어버렸다. 위장은 나를 울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내겐 텅 빈 것이 위장인지 마음인지 구분하는 능력이 없었다.
책을 펼쳐놓고 핸드폰 화면만 넘겼다. 어디에도 써먹지 못할 인터넷 개그 몇 개를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넘기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정민 씨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밖에 나간 줄도 모르고 있던 터라 깜짝 놀랐다. 손에는 우유 하나가 들려있었다. 다른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은 저 멀리 언덕 아래 있었다. 고작 우유 하나를 사러 이 밤중에 거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언덕을 올라온 것이다. 상황이 재깍 이해되지 않아 잠시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이 밤중에 왜 그 먼 곳엘 다녀오셨나요? 정민 씨도 도리어 내게 묻는다. 시리얼 먹고 싶지 않아요? 우유에 타서 드세요.
배가 고프다고 말한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정민 씨가 작업실에서 올라와 뭘 했는 지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내게 건네는 말도 가벼이 흘려보냈다. 그동안 정민 씨는 겉옷을 걸치고, 신발을 꿰어 신고 현관을 나선 뒤 가로등이 드문드문 밝히는 내리막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 편의점에 갔을 것이다. 우유를 골라 결제한 다음 가파른 오르막길로 돌아왔을 때,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스친 목덜미엔 으스스 닭살이 돋고 차가운 우유를 쥔 손바닥이 얼얼했을지도 모른다. 배고픈 내게 시리얼을 먹이려 밤하늘의 별도 채 감상하지 못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금방 휘발되었다.
내가 하루 동안 내뱉는 말들은 정민 씨 말의 몇 배는 된다.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말을 내뱉고 곧바로 잊어버리는 내 곁에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를 신중하게 재는 정민 씨가 있다. 애정의 크기와 견고함을 가볍게 떠벌리는 내 곁에 말없이 밤길을 걸어 우유를 사 오는 정민 씨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의 상황에서 부리나케 우유를 사러 뛰어 나갈 내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 먹이려 늦은 시간 우유를 사와 놓고 이 사람은 젠체 하지도 않는다. 나였다면 이미 큰 소리를 빵빵 쳤을 것이다. 이 몸이 직접 행차하여 당신 먹고 싶다던 그 우유를 구해왔으니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받으라고 턱을 내밀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당신 배고프니 어서 먹으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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