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913 화 / 용산 02 한 잔 / 긴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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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화 / 용산 02 한 잔 / 긴개

긴개 2022. 9. 13. 00:45







쫓기듯 이사한 집엔 빛이 들지 않았다. 창문은 눈보다 높게 달려 있었다. 종종 그 앞으로 지나다니는 주인집 아줌마의 쓰레빠가 보였다. 무릎은 커녕 종아리도 간신히 보이는 좁은 창문이었다. 가끔 고양이들이 창틀에 올라가 어딘가를 골똘히 보았다. 창문이 너무 높게 달린 탓에 거길 뛰어 오르고 뛰어 내릴 때 주변의 많은 것을 넘어트렸다. 비 오는 날엔 젖은 먼지가 튀고 밤엔 벌레가 들어오는 골치 아픈 창문이었다. 그래도 그 비좁은 구멍으로 들어올 강도는 없을 것 같았다.


동네는 산비탈에 있었다. 집을 나오면 무조건 가파른 내리막이나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조금만 걸어도 허벅지가 아프고 숨이 찼다. 도로엔 사람을 위한 여백이 없었다. 마을버스 백미러가 귓가를 스쳐도 앞만 보고 걸었다. 마을버스, 택배 트럭, 택시가 마주치기만 해도 좁은 길은 변비에 걸리고 만다. 결국 그 소란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골목길 지도를 새로 썼다.


마을버스는 늘 사람으로 가득했다. 피난이라도 가는 양 보따리를 바리바리 껴안은 할머니, 미네르바 스쿨에 다니는 외국인 학생들, 핫하다는 곳이라면 험로를 마다않는 젊은이들, 지친 퇴근길 직장인들, 시끄럽게 통화하는 중학생. 가장 가파른 길을 오르내릴 땐 이들 모두가 조용해진다. 자리에 앉은 사람은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 있던 사람은 고꾸라지지 않으려고. 버스 내부에는 운행을 멈추고 나면 일어나라는 빨간색 안내문이 붙어있지만 순진하게 그대로 했다간 기사의 호통을 듣거나 내릴 곳을 지나게 된다.


자주 가던 바에선 ‘용산 02’라는 연둣빛 칵테일을 팔았다. 상큼하게 입을 밝히는 맛이 내가 알던 마을버스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도 그걸 홀짝이며 산비탈을 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월에는 벚꽃으로 가득해진 산을 재차 오르내렸다. 그건 질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