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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905 월 / 초심은 우주배경복사처럼 / 긴개 본문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해서 미술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 미술대학을 졸업해놓고 미술학원에서 배운 대로 그리는 나를 보니 알겠다. 학원에서 배운 입시 미술 기본기는 대학에서 배운 수많은 이론보다 깊은 곳에 들러붙은 뒤 흡연자 폐 속의 타르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어젯밤 간만에 파레트를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하며 샀던 이 낡은 수채 파레트는 그때의 붓 세트와 함께 아직까지도 종종 책상 위에 오른다. 며칠 전 본 오리를 그리고 싶었다. 맑은 날 오리가 노니는 물가는 반짝이고 시원했다.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 스케치를 하고 수채 물감을 풀어 색을 칠했다. 한참 그려놓고 보니 알겠다. 이건 머리가 아닌 손의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다. 수고를 덜고 그려 발전이 없는 그림. 길가에 세워놓은 트럭에서 줄줄이 바닥에 늘어놓은 액자들 속 그림.
그동안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세련되고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질리도록 봐놓고도 용케도 이런 그림을 그렸다. 감각을 갈고닦는 건 눈으로 이미지를 수집하는 수동적인 방식만으로 작동하지 않는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아 종이 위에 몇 번이고 내팽개쳐야 했어. 그렇지 않고 농구 경기를 줄창 관람만 하다가 갑자기 3점 슛에 도전하겠다는 풋내기가 바로 나요. 내 개성과 고유함은 이 작은 그림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일 년 뒤 이 그림을 다시 보면 그린이가 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 같다. 손바닥만 한 그림을 보며 몇 번이나 놀라고 있다.
이 그림엔 나의 현재가 아닌 처음이 담겨있다.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초심이 어설프고 조급하게 범벅되어있다. 찢어버리고 싶다가도 봐줄만한 것 같고. 얻다 쓸까 생각하면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은 같은 그림을 다시 그려볼까 한다. 손으로 한 번 그렸으니 이번엔 머리로. 처음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나를 더 닮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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