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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418 월 / 다림판 위의 무사 / 긴개 본문
다림판 없는 다림질은 로프 없는 번지점프요, 쌍안경 없는 탐조와도 같고 마우스 없이 디자인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위험하고 불편하며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단 말이다. 다림판 없이 다림질을 해보겠다고 이 년 넘게 버텨보았지만 다리미의 짝꿍은 식탁도, 책상도 될 수 없었다. 오로지 천이 두툼하게 깔린 아름답고 오묘한 곡선의 다림판만이 다리미의 짝꿍으로서 어울리는 격을 지녔던 것이다. 자취 10여년 차, 드디어 다림판을 샀다.
다림질이란 어쩐지 내 삶에 파고들만한 부류의 일이 아니었다. 옷은 빨기도 귀찮고 널기도 귀찮은데 또 개기도 귀찮고 입기도 귀찮은, 그러나 존엄한 인간의 생필품으로서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하는 허물이요 허상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가디건에 경량패딩, 숏패딩, 롱패딩, 코트, 재킷, 기모바지, 청바지, 린넨바지 등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지런히 옷장에 넣었다 뺐다 아주 용천지랄을 해야만 이 변화무쌍한 날씨에 몸뚱이를 겨우 수습하는 실정이다. 봄가을, 그 짧은 찰나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야 말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집요함은 또 어떻고. 이러니 다림질에는 얼씬도 않고 살아온 것이다.
뜨개한 편물을 편편히 다리려 샀던 다리미는 뜨개질을 휴업한 뒤로 덩달아 조용히 먼지탑을 쌓던 신세였다. 그러다 세 달 전 문득 매일 의복을 골라 조합하는데 지치다 못해 화가 난 내가 앞으로 매일 같은 옷차림으로 다니겠다며 새로운 의복 실험을 시작한 뒤로 다시금 그 쓸모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3월 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출근하는 날에는 항상 회색 치마와 재킷, 흰 셔츠 차림으로 다니고 있다. 자발적으로 다시 교복을 입는 꼴이지만 만족스럽다. 우선 출근 준비를 하며 상하의와 아우터를 고르던 시간이 없어졌다. 기분에 따라, 유행에 따라 내일은 또 뭘 입나 고민하며 핸드폰으로 옷 쇼핑하던 시간이 줄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어 걸어두면 아침에는 그 반대의 순서대로 다시 꿰어입기만 하면 된다. 빨래 거리도 줄었다. 셔츠만 잘 관리하면 된다.
그런데 이 셔츠라는게, 빨아서 잘 널어두기만 하는 것으로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분명 카라가 하얗게 깨끗해졌지만 여전히 후줄근하다. 왜일까, 얼룩도 지우고 냄새도 안 나는 데 지저분해 보이는 이 느낌은. 자잘한 주름으로 가득한 셔츠의 구원자가 다리미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뜨개한 니트를 다릴 때는 책상에 대충 수건을 깔고 휘휘 다리미를 움직이면 끝이었지만 이 흰색 와이셔츠는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다. 어깨선이라던지, 소매, 등, 카라를 빳빳하게 다리기 위해선 결국 그것이 없어선 안된다. 지금껏 한 번도 떠올해 본 적 없는 그 이름, 다림판. 민증을 발급 받은지 십 년도 넘었지만 다림판을 구매하는 나는 엄청난 어른 같았다.
옷 쇼핑을 줄이기 위해서 시작한 의복 실험이 다림판 구매로 이어져서 되겠는가. 멈출 수 없는 소비에 찝찝했지만 자글자글 셔츠를 입고 다닐 모습을 떠올리니 그게 더 찝찝해. 집에 도착한 다림판은 예상보다 훨씬 커서 낑낑대며 박스를 뜯던 나는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어설프게 다림판을 세우고 구겨진 셔츠를 위에 얹었다. 뜨거워진 다리미로 스팀을 뿜으며 절개선을 따라 천천히 쓸었더니 청소기로 주름을 빨아들인 듯 지나간 자리가 빳빳하고 평평하다. 동시에 미간의 주름도 스륵 풀어진다. 됐다! 잘샀다! 그리고 재밌다!
공들여 다려놓고 보니 매장에 걸려있던 셔츠를 방금 집어든 것만 같다. 각 잡힌 셔츠는 날카롭고 당당해보인다. 이어서 홀린 듯 다른 셔츠들을 줄줄이 꺼내와 하나씩 다리기 시작했다. 쭈글한 옷을 빳빳하게 다듬는 동안 내 표정은 아마 칼을 가는 일본의 무사와도 같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주름이 남은 옷을 보는 것은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엄중하고 철저하게 다리미를 겨누었는데 이런 무아지경의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집안의 모든 옷을 다린 뒤에 신문과 비닐봉지마저 빳빳하게 다려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부하건대 우리 집에 침입할 때는 조심하시오. 칼 같이 다려놓은 옷 소매에 베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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