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218 토 / 차선의 인간관계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218 토 / 차선의 인간관계 / 긴개

긴개 2021. 12. 18. 22:37




오가는 사람들 옷차림이 두툼하다. 앙상한 가지는 냉정한 바람의 눈을 피해 나뭇잎 몇 개를 숨겨두었다. 손가락은 주머니 깊은 곳에 숨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기로 다짐했다. 언제부터 개시했는지 모를 붕어빵 장사가 거리 곳곳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다. 잡화점들은 앞다투어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하기 좋은 물건들을 가장 눈에 띄는 매대에 진열해두었다.

이런 장면들은 모두 시각을 활용해 계절을 추리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계절은 눈으로 알아보기가 이렇게 쉬운데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알 수가 없다. 몇 년을 가깝게 지낸 사람이 알고 보니 생명을 얻은 폐기물이었다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내면을 갖고 있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과거의 당찬 나는 여러 빌런과의 만남 끝에 친구를 매우 까다롭게 고르는 깍쟁이가 되어버렸다. 남을 덜컥 믿어버리는 바람에 크게 속앓이 했던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멀리 해야 할 사람을 추려내는 나만의 기준을 적어볼까 한다.

우선 자신의 기분을 숨기고 꾸며 말하는 사람은 경계한다. 이건 자신의 기분을 날 것으로 쏟아내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려 깊은 사람과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시무룩해지고 화날 때 괴로워 머리를 뜯는 사람이 좋다. 감정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인데 평생 마비시킬 수 없다면 자연스럽고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좋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이해하기도 수월하고 내 감정 역시 당연하게 받아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색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나는 순간에 이를 아예 없는 척하거나 꾸며내던 사람은 나와 트러블이 생겼을 때 자신의 기분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내 기분 역시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기분에서 도망가던 것처럼 내 기분에도 도망쳤다. 이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오래된 사이에도 일상 속 기분을 숨기고 잘 나누지 않는다면 관계를 다시 돌아보길 바란다. 무례하고 멋대로 구는 사람을 멀리 하는 건 쉽지만 감정 자체를 숨기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다. 부담 주지 않으려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인지, 자신부터 감정을 다루지 못해 숨기는 것인지 잘 살펴야 한다. 나와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과는 훨씬 깊고 믿음직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내 물건과 공간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 역시 경계한다. 써놓고 보니 당연해 보이지만 나는 항상 거절이 어려웠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 내 물건을 빌려달라던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거절 못해서 빌려줬던 물건들을 항상 엉망으로 돌려주거나 절대 돌려주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사과하거나 보상한 사람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내 물건이나 공간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나를 존중하거나 좋은 관계를 맺을 리가 없다. 관계를 맺더라도 나는 물건을 뺏기고 에너지를 뺏기고 눈물을 뺏길 뿐이다.

반대로 중고 물건을 멋대로 선물하던 사람도 있었다. 반쯤 쓰다 남은 물건을 산더미처럼 우리 집에 쌓아놓고는 자기가 이만큼 챙겨줬으니 관계의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원하지 않은 인생의 충고를 매일 해주고 집도 마음대로 들락날락했다. 처음엔 나를 위해 선물을 챙겨 오고 좋은 말을 해준다는데 고맙게 생각하려 했지만 원하지 않는 물건과 말을 억지로 주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이후 그 물건들을 버리느라 종량제 봉투를 새로 사고 몇 번이나 분리수거를 해야 했다. 개개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하면 선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이 좋다.

마지막으로는 나를 대할 때와 남을 대할 때가 크게 다른 사람을 경계한다. 내겐 쉽게 짜증을 내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선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면 둘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한쪽이 열등한 관계일 뿐이다. 예전엔 서로 욕을 하고 막말을 하는 사이가 가깝고 진실하다고 착각했다. 청소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안다. 쌍욕을 하고 무례하게 대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인격과 작업을 존중하고 진실로 아끼는 관계란 쉽지 않다. 나를 남보다 아쉽게 대하는 사람 옆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의리나 우정이 아님을 이제야 알았다.

글로 써놓고 보니 다 뻔한 내용이지만 항상 헷갈렸다. ‘나를 생각하느라 말을 좀 세게 했나 봐’, ‘가까운 사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수도 있지’,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번엔 실수로 그랬을 거야’. 좋게 좋게 해석하고 잘 맞춰보려 노력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점점 만나는 사람들을 까다롭게 고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돌아볼 줄 알고 배려심 깊은 현명한 사람만 골랐더니 이전보다 만남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 한정된 시간과 돈, 마음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는 일이 줄었다. 동시에 나 역시 고마운 사람들에게 걸맞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모두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최소한 나를 잃어버리게 하는 사람만큼은 걸러내는 눈썰미를 길러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최선이 없다면 차선이라는 소심하지만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