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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2018년 8월에 썼던 <비를 맞지 않는 남자> 본문
<비를 맞지 않는 남자>
2018. 8. 31. 18:38
남자는 18살 즈음에 깨달았다. 자신은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남들은 비가 내리면 몸이 젖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이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은 부모님이 가르쳐 준 이후 그대로 해온 행동이다. 느닷없이 소나기에 마주한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그저 즐거워서 그러는 줄로만 여겼다. 별생각 없이 가방에 항상 남색 3단 우산을 넣어 다닌 덕에 맨몸으로 비 맞을 일이 없었다. 가방에 남색 우산과 립밤, 지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을 더 넣어야 할지도 몰랐고, 넣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남들이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쓸 때 함께 우산을 들었다. 건물에서 나설 때 남들이 우산을 찾으면 그도 우산을 썼다. 그는 우산을 그저 어떤 사회적 합의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는 그가 그렇게 신경 쓰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외에도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비슷하게 살았다.
18살이 되던 해, 그때까지 살던 집에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그렇고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 때 아버지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사는 마법같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 같았다. 약속한 날 사람들이 와서 집 안의 물건들을 담아 가져 갔고, 새로운 집에 가니 그 물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사는 그렇게 끝이었다. 새로 옮긴 학교에도 학생들과 선생님이 있었고 수학과 영어가 있었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어떤 것들은 그저 이름만 바뀐 듯했다. 학교 아이들도 이름만 달랐다. 힘센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안경만 썼지 공부는 영 틀려먹은 아이,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아이, 웃기는 말을 잘하는 아이들은 이전의 학교에도 있었다. 심드렁하게 등교해 심드렁하게 하교했다.
달력의 숫자만 달라진 어느 날, 그는 수업이 끝나고 남들처럼 우산을 쓴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호수라고 하기에는 작았지만 그저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꽤 넓었다. 여름의 연잎은 햇빛을 잔뜩 받고 그의 키만큼 높게 자랐다. 잎은 피자 패밀리 사이즈보다 넓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은 녹색 피자의 움푹 들어간 가운데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인 물은 커피 한 잔이 채 되기 전에 기울어진 잎을 따라 흘러 작은 키의 잎으로 떨어졌다. 그는 커다란 연못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연잎 사이로 하얀 봉오리들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몇몇 봉오리는 분홍빛이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여자도 분홍빛이었다.
여자는 흰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분홍빛을 띠었다. 그는 조금 더 천천히 걸었고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흰 교복은 비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있었다. 투명해진 교복 안에는 더 옷이 없었기 때문에 몸이 그대로 비쳤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는 그가 가야 하는 길목에 서있었고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자에게 끌려가는 기분으로 걸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칼이 목과 이마에 온통 달라붙어 있었다. 눈가도 분홍빛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계속 걸었다. 여자는 추워 보였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남자는 여자가 우산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비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손에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손에 든 남색 우산은 소중한 물건이 아니었고 비슷한 것은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여자는 비가 올 때 남들처럼 우산을 쓰고 싶을 것이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대뜸 우산을 건넸다. 비가 눈꺼풀을 따라 쉴 새 없이 흘러 여자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한 손으로 우산을 받아 들었다. 남들처럼 우산을 들었으니 이제 여자는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드니 여자는 뭔가에 소름 끼치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에서 물이 아무리 땅으로 꽂혀도 그는 조금도 젖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와 자신의 몸을 번갈아 보았다. 우산은 비가 올 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드는 물건이 아니었다. 여자는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더니 뒷걸음질 쳤다. 우산을 바닥에 떨어트리자마자 여자는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남자는 여자가 떠난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연잎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연잎을 적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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