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124 금 / 야매글방의 흰눈썹황금새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124 금 / 야매글방의 흰눈썹황금새 / 긴개

긴개 2023. 11. 26. 10:45


민증을 발급받은 후로 열 번의 이사를 다녔다. 짐을 풀어 그 위에 먼지가 두껍게 쌓일라치면 다시 짐을 꾸리는 식이었다. 이전에 살아본 적 없는 동네들로 새 길을 내며 줄기차게 흘러 다녔다. 그러니까 변화를 두려워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중에서 고르자면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모든 번잡합을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 이사를 많이 다닌 것인지, 이사를 많이 다녀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이사를 기준으로 변화에 대한 적응성을 평가하자면 그렇다는 말이고.

내가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사람이라면, ‘빨리’는 어느 정도의 기간을 뜻할까. 한 달 전 나는 책방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위치를 달칵 켜듯 느닷없이 대출을 받았고 눈 여겨보던 점포를 계약한 뒤 냅다 퇴사를 했다. 사번한 내부 공사를 마치고 작은 골목에 걸맞은 작은 글방을 열었다. 그리고 글방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한 달 전과 지금의 상황이 크게 변했다. 월급쟁이에서 자영업자로, 직원에서 대표로 위치가 바뀐 것이다. 오전 열 시였던 출근 시간도 열한 시 즈음으로 한 시간가량 늦춰졌다. 대신 퇴근은 한두 시간 더 늦다. 휴일은 원래도 비정기적이거나 없었기에 그것만은 여전하다. 그 사이 눈썹도 밝게 탈색했고 간단한 화장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내가 눈썹을 전부 밀어버린 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노랑 터틀넥을 입은 날은 흰눈썹황금새 같기도 했다. 급격한 상황 변화와 외면 치장 사이의 연관에 대해선 어떤 심리학자가 원인을 밝혀놓지 않았을까 싶어 ‘퇴사 후 탈색’을 검색했더니 수많은 퇴사자들의 탈색 후기 블로그가 떴다. 퇴사 후 체모를 밝게 만드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별 후 단발’처럼 ‘퇴사 후 탈색’에도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꼭 과학자들이 밝혀주길 바란다. 여하튼 빚을 만들고 직장을 바꾸고 눈썹을 밝히는 동안 한 달이 흘렀으므로 여기에서의 ‘빨리’는 한 달이라 생각해주면 좋겠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행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라도 깜짝 놀라 이것저것 되물었을 것이다. 아니 그 사람이 문창과를 나왔던가? 소설가로 등단을 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자고 그렇게 큰 일을 벌였대? 갑자기 글방을 연 사람의 전문성, 책임감, 자격 등을 따지며 수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인이 내게 ‘야매’라고 칭한 것은 속은 쓰리지만 당연한 반응 중 하나이다. 입을 다물게 할 근사한 타이틀 한 줄 타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 변화에는 무던히 적응했지만 내게 던져지는 자비 없는 말에 헤헤 웃어 넘기기는 여전히 연습이 필요하다. 만약 열 번의 이사가 나를 무던한 사람으로 단련시켰다면 야매 소리도 앞으로 아홉 번은 더 들어야 할 테다. 듣다보면 스트레스받아 저절로 체모가 희게 세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번거롭게 탈색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물론 스스로를 어떤 직업인으로 둔갑시키려면 마땅히 자격이나 전문성이 갖춰져야 하는 법이다. 초등학교 선생은 교육대학, 중·고등학교 선생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임용시험을 치러야 자격을 얻으며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리기 위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자격증 시험이 탄생했던가. 문예창작과도, 국어국문학과 출신도 아닌 평민 출신의 내가 글방을 열고자 했다면 하다못해 독서와 작문에 관한 자격증이라도 따두어야 했을 텐데, 찾아보면 또 독서토론지도사, 토의토론지도사, 독서지도사, 논술지도사, 토의·토론지도사, 하브루타독서토론지도사 등등 수많은 자격증 과정이 와락 쏟아져 나오고, 토익·토플 한 번 따본 적 없던 내가 이 중에서 도대체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글쎄 눈앞이 아득해지고 반 정도 남은 찬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너그럽게 보아 자격증은 됐다 쳐도 손가락을 쳐들었던 사람들이 무릎을 칠만한 당위는 필요하지 않을까. 왜 글방이었는지.

그러게, 왜 글방을 열었을까. 서점도 아니고. 물론 서점도 좋다. 새로 나온 책을 먼저 만져보고 이리저리 넘겨볼 수 있다. 때로 읽지도 않은 책을 정리하고 있노라면 손님들은 내가 벌써 그 책을 다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책에 관해 묻기도 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데에는 별다른 자격이 필요하지 않지만,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어딘가 지식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사람 같은 착시를 일으키곤 했다. 유흥가 편의점에서 일할 때보다 서점에서 일할 때 존댓말을 더 많이 듣는 것도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선비들의 나라가 빚은 책의 신성 덕분에 수상해 보이는 외관으로도 쉽게 선생님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서점이란 돈벌이론 영 신통치 않지만 명함으로 쓰기엔 요긴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건이다. 품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매일 배달되는 종이상자에서 책을 꺼내 매입하고 진열하고 상자를 정리하며 팔 근육을 혹사하는 것은 편의점 근무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매상은 편의점보다 낮을 때가 많다. 책을 읽고 문구를 골라 기껏 만든 이미지와 함께 홍보를 해도 판매가 저조하니 책의 효능에 의심을 품는다.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오마카세나 호텔에서 뒹굴거리다 오는 호캉스가 유행하는 시절이라도 책 한 권 가격이 이만 원을 넘어가면 좀처럼 계산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이거 진짜 재밌는 책인데 왜 팔리질 않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그 책은 내가 사고, 책방에서 인기 없던 책이 좁은 우리 집에 쌓여가는 날들이 반복된다. 집에 옮겨놓았다고 전부 읽는 것도 아니기에 책방의 낡은 재고가 장소만 바뀐 채 더욱 낡아갈 뿐이다. 낡은 새 책을 잔뜩 모으다 어느 날 타고난 오지랖이 꿈틀댄다. 책 판매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둘러앉아 끝까지 읽고 떠들 시간을 만들고 싶다. 이 문장은 어떻게 읽었는지, 읽으며 한 엉뚱한 생각은 무엇인지, 내 삶과 가장 맞닿은 부분은 어디인지 귀찮게 캐묻고 싶다. 또 그 생각을 말로만 하지 말고 종이에도 옮겨보게 하고 싶다. 그러면 머릿속에만 있던 뿌연 생각이 입을 거치며 하나의 말이 되고, 종이에 옮기며 정리된 문장이 되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다채롭고 즐겁고 또 지겹고 미칠 것 같은지. 그것마저 나누고 싶다.

한편으론 글 쓰고 책 읽는 것이 뭐 대수인가 싶다. 한글만 떼면 읽고 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자격을 증명해야 글방을 운영할 수 있나? 배 째라 허리에 손을 얹고 싶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저으리라. ㅏ와 ㅓ가 다르고 수필과 소설이 다르고 문장 하나도 처음과 끝이 다른데 어떻게 쉬이 쓰고 읽는단 말인가. 치열하게 읽고 쓰지 않은 사람이 글방을 차린다고 해도 벌린 입으로 파리만 삼킬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최대한 입을 가려야 한다. 한참 멀었다. 나보다 많이 읽고 쓰는 사람들 얼굴이 머릿속에 사이다 기포처럼 보글보글 떠오른다.

또한 글방을 운영하려면 글빨이나 이력뿐만 아니라 올곧은 심성과 무결한 과거 등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아서 찔렸다. 왈칵 화도 잘 내고 구시렁 욕도 많고 싫은 것도 많은 내가 글방을 운영한다고 하면 누군가 손을 번쩍 드는 건 아닐까. 저기요, 본인이나 잘하세요! 하고. 그럼 또 할 말이 없다. 성격이 더러워도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묻고 싶다. 나보다 성격 더러운데 성공한 작가 어디 없냐고. 가서 말씀 좀 듣고 싶다. 더럽고 지질한 성격을 갖고도 어떻게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나요? 그렇게 살아도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나요? 혹시 그런 성격이 되려 창작에 도움이 되던가요? 하지만 그런 수소문을 했다가 들키면 정말 혼날 것 같으니 참는다. 무던하고 밉지 않은 성격이 되도록 둥글둥글 사는 노력할 수밖에.

글에 대단한 이력이 없다는 것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구차하기에 솔직하게 알리는 편이 좋다.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력도 없는데 재미도 없단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앞으로도 정진하며 꾸준히 연필 끝 날카롭게 갈아내는 것 말고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으랴. 누가 야매라 불러준다면 그에게로 가서 야매가 되어줄 뿐. 뒤늦게 변화에 겁내지 않되 결정에는 더욱 신중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다’하고 한 치의 부끄러움 없이 글방을 열 수 있는 순간은 또 언제가 될 것이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이라는 게 보통의 사람보다 작은 그릇에 담겨 있어 결국 지금의 결정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벌린 일을 잘 주워 담고 굴려가야 한다. 닥치고 쓰고 읽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