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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노바디 홀덤 Nobody hold’em _ 긴개 231208 본문
노바디 홀덤 Nobody hold’em
긴개
딜러는 간신히 하품을 참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카드 두 장씩을 손에 움켜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폴드던 콜이던 상관없으니 빨리 진행하고 싶다. 그러나 딜러에겐 운 나쁘게도 오늘 카지노엔 유난히 손님이 없다. 자기 앞에 앉은 이 두 사람은 이미 게임 진행에는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면 핑계를 대고 눈치라도 줄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크루즈는 천천히 바다를 달리고 있다. 고층 건물만큼 큰 크루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서 바다에 떠있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는다. 지루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딜러는 두 사람 몰래 허벅지를 꼬집었다.
허연이 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그 감독 작품이 다 뻔하더라고요.”
“왜요?”
“수직 관계의 시발점이 뻔해요. 그리고 재미없고.”
“수직 관계가 뭐가 뻔한데요?”
“그야 한국 사회에서 너무 드러난 소재니까….”
“아까 노동과 차별로 뭔가 썼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수직 관계랑 다른가?”
“어머, 왜 또 따지듯이….”
큼큼.
헛기침 소리에 지후가 딜러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칩 몇 개를 앞으로 밀었다.
“저는 콜이요.”
딜러가 고개를 돌리자 허연은 지후가 낸 칩의 두 배를 내밀었다.
“저는 레이즈요.”
지후는 무표정으로 카드를 보고 있다. 홀 입구에서 연주 중이던 피아노 연주자가 음을 하나 틀린다. 그는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사람이 없어서인지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허연은 빨대에 입을 대고 얼마 남지 않은 주스를 마신다. 얼음 사이 바닥을 보이는 주스를 빨아들이느라 요란한 소리가 난다.
“저도 레이즈요.”
지후가 허연만큼의 칩을 테이블에 얹는다. 딜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 세 장을 앞 면이 보이도록 펼쳐놓았다. 둘은 말없이 카드만 본다. 허연이 홀 직원을 불러 새 주스를 청한다. 그 사이 들고 있던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지후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런 거 쓴다고 누가 알아줘요? 참, 나도 옛날에 여행 다니며 쓴 글로 책을 내긴 했는데, 그거 하나 썼다고 유명해진 건 아니니까 뭐. 꽤 인기 있긴 했어요. 내 책 한 번 보여줄까요?”
지후가 핸드폰을 켜고 사진 앱을 여는 동안 딜러는 손가락을 우둑우둑 꺾었다. 망설이던 딜러가 입을 떼려는데 허연이 선수를 쳤다.
“아뇨, 괜찮은데. 이번엔 저부터 베팅이죠? 저는 콜.”
“그래, 난 또 글 쓰는 사람이래서 인풋이 많이 필요한 줄 알았죠. 여기 딜러 님도 카지노 채용됐을 때 게임 공부 많이 하지 않았어요? 뭐든 배워야 잘하니까.”
딜러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허연은 직원이 가져다준 새 주스를 반 정도 들이킨다.
“저 대학원 갈 거예요.”
“그래요? 어디로요?”
“같은 대학의 대학원이요.”
“어느 대학인데요?”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지후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천천히 의자에 기대며 말한다.
“아니, 내가 학력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대단하신 분 같은데 어떻게 공부하고 있나 궁금할 순 있잖아요?”
“그런가요? 제가 남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저 콜 했는데 어떡하실래요?”
“사람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무슨 주제로 글을 쓰나요? 내 주변에도 관찰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긴 한데. 근데 딜러 님이야말로 글 쓰면 재밌겠다. 여기서 하루종일 사람들 관찰하실 거 아녜요. 웃긴 사람들 엄청 많죠, 그쵸?”
딜러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들 개성이 있으신 거죠. 손님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허연은 컵으로 테이블을 긁기 시작했다. 지후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더니 칩을 집어 내밀었다. 그는 테이블에 들고 왔던 위스키 잔에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았다.
“저도 콜이요. 나는 그 소리 들어봤어요. 메타인지가 높은 편이라고. 궁금해서 책 읽어봤더니 전부 내 얘기더라고요. 메타인지가 높으면 머리가 좋대요. 나 놀랐잖아, 이게 머리가 좋은 거면 다른 사람들은 다 이렇지 않다는 건가? 하하.”
컵을 여전히 쥐고 있던 허연도 입을 열었다.
“메타인지가 높은 편이라고요? 농담이죠? 저도 그런 뇌과학책 읽어봤는데, 그러신 지는 모르겠네요. 전 과학자들 마음에 안 들어요. 인간 세계를 다 아는 척, 이것저것 알려주는 척. 데리다가 말한 존재론적인 양상에 따르면 그런 것도 다 웃긴 거잖아요.”
“오, 데리다 좋아해요? 나 아는 박사님이 또 데리다 철학의 허점을 꼬집은 논문으로 요즘 강의하시던데. 링크 보내드릴까요? 근데 데리다가 왜 좋아요?”
“좋다기보다는, 과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세상의 빈 공간이 분명히 있는데 무엇이 본질인지 아닌지를 왜 자기네가 결정하냐고요. 건방지게.”
“빈 공간이 뭔데요?”
“과학이 다 설명하지 못 하는 게 있잖아요.”
“그게 뭔데요?”
딜러는 대화가 끝나기 전에 카드 한 장을 더 펼쳐놓았다. 허연은 카드를 보느라 지후의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한다. 지후가 웃으며 말한다.
“그쪽에서 팁 좀 드려야겠다. 딜러 님, 센스가 좋으시네.”
“아닙니다. 즐겨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제 마지막 베팅하시면 리버 카드 오픈하겠습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카드는 잘 덮어서 여기 두고 다녀오시면 됩니다.”
허연이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걷는다. 피아노 연주자는 아까부터 같은 음악만 연주하고 있다. 다른 악보를 챙겨 오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자신과 함께 홀에 갇힌 사람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지후는 그제야 자신의 잔을 들어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킨다. 잠시 입에서 우물거리더니 꿀떡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화장실 다녀올게요.”
“음, 네. 카드 여기 두시면 됩니다.”
딜러는 목을 천천히 돌리며 굳은 근육을 풀었다. 허리를 왼쪽으로 깊게 틀었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틀었다. 테이블 아래에 두었던 잔을 꺼내 입가심도 했다. 지나가던 홀 직원은 다 이해한다는 듯 은근한 표정으로 윙크했다. 그 사이 도돌이표 연주가 또 한 번 끝났다. 카지노 안에선 밖이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의 동선으로 짐작한 것보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허연과 지후는 돌아오지 않았다. 딜러는 무전기를 켰다.
“12번 테이블 딜러 교체요.”
아무도 대답이 없다. 고개를 갸웃하며 딜러가 몇 번 더 무전기 버튼을 누른다. 갑자기 카지노 바깥 복도가 소란스럽다. 피아노 연주자는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다. 그때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코드 블랙, 코드 블랙. 8층 여자 화장실 앞. 코드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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