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1003 화 / 백사실계곡을 넘어 모더니스트 김용익에게로 [라스트제너레이션에게 전시 후기] - 2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1003 화 / 백사실계곡을 넘어 모더니스트 김용익에게로 [라스트제너레이션에게 전시 후기] - 2 / 긴개

긴개 2023. 10. 3. 16:31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방문은 처음이었다. 이름도 주변 지리도 낯설다. 아무리 전시 방문 빈도가 낮은 편이라 해도 명색이 미술학도였는데 이렇게 미술관이 낯설어서야 되겠나. 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검색해 보니 개관일이 올해 4월 4일이라니. 그럼 그렇지. 미술관에 잘 가진 않지만 내가 모르는 미술관이 많아선 안 되지. 전혀 낯설지 않은 척, 당당하고 느린 걸음걸이로 야트막하게 옆으로 넓게 펼쳐진 새 건물에 입성했다.

비록 어슐러 K. 르 귄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예술은 해설이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을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나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쓴 작가의 설명이 곁들여진 현대 미술이 불만스럽다.’고 말했지만, 나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가 제공하는 차고 넘치는 설명이 좋았다. 물론 구구절절 설명을 들어야만 비로소 관객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구차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도 ‘설명을 안 하면 그걸 모른다는 건,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거야’라고 하지 않던가. 작품 실물을 앞에 두고 설명이 담긴 종이에 코를 박고 있는 광경이 과연 ‘예술 향유’인지는 논의해 볼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해설 없이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의자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시간이 무지 걸릴 테니까. 의자에 앉았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탐정 캐릭터에 이입해보라. 예리한 눈으로 작품에 쓰인 소재의 연식, 드로잉에서 밝혀낼 수 있는 것들(작가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빠르게 움직이며 그렸는지 혹은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렸는지 등)을 살펴보고, 부족하다면 제목에서도 힌트를 얻는다. 시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 이것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인지, 혹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지 엮고 풀어낸다. 이제 한 작품의 감상이 끝났다. 의자를 조금 옮겨 다음 작품을 감상해 보자.

이런 식이면 전시장이 개관할 때 들어가서 폐관할 때 나와도 전시 하나를 감상하기 빠듯하다. 이미 나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 도달하기까지 세 시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전시 관람에 한 시간 이상은 쓰고 싶지 않다. 점심에 먹은 김밥과 배도 소화된 지 오래였다. 미술관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기꺼이 수용하고 열심히 읽겠다.

전시제목은 「라스트제너레이션에게, 김용익」. 팸플릿에는 ‘개념주의 미술, 모더니즘 미술, 공공미술에 걸쳐 다층적인 작업을 전개해 온 김용익(1947-)의 미학과 태도, 사유와 실천에 주목하는 전시’라 쓰여 있다. 이런 문장들은 내 눈을 거쳐 그대로 뒤통수를 통과해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전시를 다 본 후에 다시 읽으니 실감이 났다. 아름답거나 충격적인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것보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집중했으니 개념주의 미술이겠고, 그의 말마따나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모더니즘이라면 자신의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전복을 꾀한 그의 행위 역시 모더니즘 미술이리라. ‘미술을 포함한 인류 문명이라는 확장된 맥락에 대한 구체적인 환기’가 공공 미술의 단서라면 기후 재앙을 주제로 다루고, 제의 형식의 ‘저低 엔트로피적’ 작업을 발표한 것 역시 수긍할 수 있는 흐름이다.

이후 관람하며 찍은 사진을 살펴보니 ‘이면지 드로잉 일기’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치된 인쇄물이었다. 기억나는 것 역시 작품의 시각 이미지가 아닌 이야기들이다. 작가와 미술관이 제공하는 정보의 비중이 큰 전시였다. 섹션마다 관련된 작가의 글을 가져갈 수 있도록 인쇄해 비치했으며 텍스트 원본 자체가 작품인 경우도 많았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이면지 뒷면에 매일 한 페이지씩 완성한 ‘이면지 드로잉 일기’는 이면에 그려진 드로잉뿐만 아니라 원래 해당 종이가 담고 있던 내용이 있는 원면까지 스캔한 뒤 아카이브 해놓았다. 전시장 내의 터치 스크린을 사용해 그 양면을 전부 확인할 수 있게 한 것도 대단했다. 국공립 최초의 아카이브 전문 미술관인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와 50여 년간 사유를 글로 남긴 김용익이기에 가능한 전시 형식이었다.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서신, 메모, 공문 등의 모든 자료를 전부 모으고 분류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작가 개인을 넘어 그와 관계된 인물, 공간, 전시 등 다양한 대상과의 관계도까지 만들어 놓았다. ‘현대미술’, ‘대지미술’ 등의 키워드 역시 시각적 관계도로 연관된 작가, 개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미술관의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 김용익이라는 작가만큼이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와의 만남도 반가웠다.

김용익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마음에 들었는데, 하나는 그가 오래도록 글을 써왔다는 사실이었다. 전시장엔 정말이지 글이 넘쳐났다. 그의 지인이 쓴 몇몇 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의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가 오래도록 운영한 네이버 블로그에도 최신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기록하고 되돌아본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경지에 그가 이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부럽고도 경외로웠다. 글쓰기가 문학 작가가 아닌 예술 작가에게도 그 자신의 영혼을 퍼올리고 정화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증거일 테다. 글쓰기라는 수행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닿을 거라 믿고 싶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사유 그 자체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만드는 데 힘(노동력)이 적게 드는 작품일수록 좋은 것이다.
둘째, 만드는 데 돈(재료)이 적게 드는 작품일수록 좋은 것이다.
셋째, 만드는 기술이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나와 똑같이,)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일수록 좋은 것이다.
넷째, 운반하기 쉽고 편리한 작품일수록 좋은 것이다.
다섯째, 좀 찢어진다든가, 더럽혀진다든가, 약간 부서져도 괜찮은 작품일수록 좋은 것이다. [...]’
「작가 노우트」, 『월간재정』 (1987년 2월호)


예술 작품의 권위와 신성을 던져두고 누구나 쉽게 닿고 즐길 수 있는, 생활 속 예술의 의미를 찾고자 하지 않았을까. 또한 작품을 스스로 밀봉하고 붓질로 지워내며 관에 넣는 전복으로 끝없는 자기반성과 되새김을 드러낸다. 작성했던 인쇄물의 뒷면에 드로잉을 하고 운하 설립 위기에 처한 금강을 대신해 ‘날 그냥 흐르게 좀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낸다. 더 이상 물감, 색연필 등의 회구를 새로 들이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을 소진해 가는, 그래서 작업이 점점 흐릿해지고 단색이 될 것을 예상한, 그로써 기후 재앙에 빠진 인류세에 미술이 갖는 의미를 다시금 답해보는 그의 끊임없는 자기 문답에 나 역시 감응한다.

‘내가 지금 에코 아나키즘을 입에 올리며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저(低) 엔트로피 작업을 하고있지만 내가 에코 아나키즘을 내 삶과 예술로 수행하기엔 이미 나는 자본이 제공하는 삶의 안락함에 깊숙이 중독되어있어서 에코 아나키즘을 주장할 토대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이런 작업을 하고 발표를 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제작하고 발표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자기위안 때문이다. 자기위안이라도 하지않고는 이 파국의 시대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라는 유기적 생명체 위에 살고있는 인간의 역사가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있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그 파국을 저지해야함을 알면서도 자본주의의 유혹과 겁박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나와 동류의 사람들에게 나의 작품은 조그만 자기위안 거리를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에코 아나키즘을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에 동조 함으로써 뭔가 이 파국을 지연시키는데 일조라도 하는게 아니겠느냐는 위안 말이다.’

2018년 3월 5일
‘엔드리스 드로잉(endless drawing)’, 김용익 네이버 블로그 중에서
https://m.blog.naver.com/profyongik/221221802831



전시를 보기 전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텅 빈 마음으로 새로운 사유들을 후루룩 받아들였다. 여기 까지라면 그저 수동적인 관람에 그치지 않나. 비평하거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혹은 내 삶의 한 부분과 연관해 나만의 이야기를 엮는 것까지가 진정한 마무리일 텐데, 그러기엔 내가 아직 그의 작품 어느 하나 온전히 소화했다고 말할 수 없다.

충분한 마무리를 위해 한동안 내가 할 것은 김용익 작가에게 관심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 해당 주제를 다룬 다른 작가의 작업 연구 등도 있겠으나 역시나 우선적으로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자료를 두루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이 글을 쓰는 데 이틀이 걸렸으니 자료를 찾고 다시 소화하는 데에는 또 며칠이 걸릴 것이다. 이러니 전시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지금에서 하면 좀 멋이 없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