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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1106 일 / 일주일 전 / 긴개 본문
흰 국화 한 다발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생기가 넘친다. 처음엔 봉오리였던 것들이 꽉 쥐고 있던 여러 겹의 잎을 서서히 늘어놓으며 오히려 더 만발하기도 했다. 국화는 일종의 선전물이었다. 거기에서 좋은 향기가 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태어난 꽃이라면 필히 진다. 그것은 모두가 합의하지 않아도 예정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고 말았다. 도대체 여기서 뭘 깨우치고 반성하고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지 그냥 다 때려치우고 없던 일로 해버리면 나는 희대의 영웅이 될 것이다. 간절한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없고, 얼떨결에 영웅을 떠맡은 사람들은 괴로워 잠을 설친다.
분향소엔 두 번 갔다. 그중 하나엔 기자들이 목 좋은 곳에 줄 지어 서 있었다. 조문객들이 안내에 따라 우르르 이동하고 목례를 하는 동안 등 뒤에선 찰칵찰칵찰칵찰칵. 다시 우르르 이동해 인사말을 적는 동안 또 옆에서 찰칵찰칵찰칵. 하필 나는 유달리 튀는 차림이었다.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고추장처럼 짙고 쨍한 빨간색 패딩을 입고 서서 흰 국화를 들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돌아왔다. 삼 분 안에 모든 코스를 다 돌고 나오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러나 만약 피해자의 지인이나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이 지나가다가 길게 늘어선 조문객을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는다면, 그렇다면야 지나다닐 때마다 국화쯤은 얼마든지 놓아줄 수 있지.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까.
또 하나의 분향소엔 두 손을 포개고 기다리는 사람이 적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자도 없다. 이 사람들은 소식을 어떻게 듣고 어떤 마음으로 왔을까. 한국식 장례 순서가 어색해 우물쭈물 서로를 등 떠미는 외국인들에게 안내원이 차분히 손짓하며 국화를 들게 시킨다. 멀리서부터 분향소까지 가는 길엔 서로를 꼭 붙잡은 노부부가 계속 내 앞을 걸었다. 추월하기엔 길이 좁고 기다리자니 한 없이 느려 답답했는데 이 불안한 이인삼각 커플은 겨우 국화 한 송이씩 놓고는 다시 왔던 길로 천천히 돌아갔다. 오직 그러기 위해 걸어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명을 추월해 먼저 하직한 생면부지의 젊은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기까지라서. 나는 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혹시나 찾아오는 사람 없는 분향소를 보고 누군가 마음이 찢어질까 봐 입을 다물었다.
분향소 뒤편엔 코스모스가 한가득 핀 공원이 있었다. 오랫동안 높은 담으로 막혀 안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담도 걷고 꽃도 가득 심어놓았다. 사람들이 만발한 꽃길 사이에서 하늘을 업고 포즈를 취했다. 하늘은 푸르고 분향소는 검고 코스모스는 알록달록하고 국화는 희고 누구는 죽고 누구는 행복하다. 국화를 한 송이씩 갖다 놓은 다음엔 나도 꽃밭에 뛰어갔다. 먹먹하게 인사말을 쓰고 엄숙하게 횡단보도를 건너서는 코스모스가 환상적으로 피어있는 들판을 마구 뛰었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다 근사했다. 등 뒤에는 분향소가 있고 나는 핸드폰으로 코스모스를 이렇게도 찍었다가 저렇게도 찍는다. 아까 지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슬픔의 궤도에서 스윙바이* 해 행복에 이르기까지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거면 슬퍼하지나 말던가. 국화를 들지나 말던가. 어느 순간 어떤 조건들이 다 완벽하게 맞춰지면 그때만 짤막하게 눈시울을 붉히다 말건가. 시시각각 많은 것들을 잊어간다. 이러다가는 무엇을 잊었는지도 잊게 될 텐데, 그래서는 안 되잖아. 왜? 왜냐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니까.
*swingby 란 우주 탐사선의 항법 중 하나로 행성이나 다른 천체의 중력을 이용하여 우주 탐사선의 궤도를 조정하고 속도를 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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