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단편소설] 네버 엔딩 뽀삐 / 긴개 / 0925 본문

2021-2023 긴개

[단편소설] 네버 엔딩 뽀삐 / 긴개 / 0925

긴개 2023. 9. 25. 00:26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하품을 했다. 오후의 겨울 햇볕은 부엌까지 깊게 스며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코를 킁킁거리다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 부드러운 방석 위에선 어떻게 누워도 늘어지게 잘 수 있지만, 이런 잠투정이야말로 내 처지의 본분일 테니. 다시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문이 닫힌 작은 방 안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내 쪽이 하품 뒤의 느긋한 눈물 한 방울을 문질러 닦는 동안, 저기선 좌절과 절망, 체념이 콸콸 흐른다. 하여간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이라니까. 넌 아직 내가 겪은 나날의 반에도 미치질 못했는데. 지금부터 이렇게 무너져 내리면 앞으론 어쩌려는 거야. 제 팔자 제가 꼰다던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몰라. 저것도 제 복이다. 나는 눈을 감고 뒹굴 몸을 돌렸다.

도시가 만든 울퉁불퉁한 지평선 너머로 막 해가 넘어갈 즈음, 아줌마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허겁지겁 신발을 벗고는 곧바로 소파 위 방석에 누워있던 내게 조르르 달려온다.

“우리 뽀삐! 잘 있었어~~~?”
“뽀삐 배고팠지~~~?”
“이건 우리 뽀삐 주려고 오늘 플리마켓에서 사 온 수제 간식인데 거기 재료가 전부 유기농이야!”
“근데 이 사장님 진짜 인기 많더라, 엄마가 이거 사려고 줄을 한 시간 섰어~~~!”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자 나는 참지 못하고 아줌마의 손에 들린 간식을 잽싸게 입으로 낚아챘다. 방석 위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씹어대기 시작했다. 오리 날개인가? 한 시간 줄을 섰다니 그 정도는 아닌걸. 아줌마는 열심히 뼈를 뜯는 내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기 시작했다. 리뷰를 올려 이벤트에 참여하면 더 맛있는 걸 받을 수도 있다나. 내가 골고루 뼈를 씹느라 열중하는 동안 작은 방문이 열리고 진아가 나왔다. 눈자위가 붉은데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뽀삐 점심에 간식 먹였니?”
“네, 그 식탁에 포스트잇 붙여놓으신 걸로요.”
“그래.”

아줌마는 진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줌마 뒤에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짓던 진아는 도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점심에 간식을 주긴 뭘 줘. 진아는 식탁에 있던 내 간식을 길고양이한테 줘 버렸다. 그래봤자 걔네 입맛엔 맞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저녁엔 또 아줌마가 매일 맛있는 걸 구해다 바치니 큰 불만은 없다. 진아는 자기가 뽀삐일 때 받은 귀여움과 사랑은 모두 잊었다. 지금 생의 기억만으로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지난 생의 굴욕과 설움을 모두 안고 지금을 누리고 있으니, 그저 우습고 즐거울밖에. 꼬리를 살랑 흔드니 아줌마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안고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돌았다.

개로 태어났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뻤다. 내가 알던 유일한 개 뽀삐는 우리 엄마의 자랑이자 삶의 희망이었다. 엄마는 뽀삐를 위해 살았다. 어디든 뽀삐를 데리고 다녔고 심지어 뽀삐를 위해 뜨개를 배우고 옷을 만들기도 했다. 매일 잠들기 전 빌었다. 뽀삐와 내 영혼이 서로 바뀌게 해달라고. 그래서 한 번이라도 엄마가 뽀삐에게 주는 눈빛을 직접 보고 싶었다. 뽀삐는 못생긴 우리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한 가장 예쁜 것이었다. 나는 못생긴 우리 아빠가 엄마에게 떠넘긴 가장 추한 것이었고.

파피용이라는 견종의 그 개는 참 예뻤다. 특히 커다란 귀 아래로 길게 하늘거리는 털이 우아했다. 총총 가볍게, 그러나 경박하지 않게 걷는 모습에서 가히 귀한 혈통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가 잘 나갈 땐 그런 개 한 마리 사 오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엔 수많은 보석과 화려한 드레스, 집 한 채 값의 가방이 가득했다. 그러다 지겹고 뻔한 드라마처럼 아빠의 사업은 거품이 빠지던 경제 상황에 휩쓸려 함께 쪼그라들었고, 엄마는 모든 걸 뺏기면서도 뽀삐만은 꽁꽁 안고 놓지 않았다. 가장 멋진 매력이었던 돈을 잃은 아빠는 그저 한 명의 추남이 되었고 나 역시 부잣집 외동딸에서 그저 못생긴 기집애로 전락해버렸으나, 뽀삐는 여전히 이전의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단칸방이 된 우리 집에 잠시 민생을 살피러 방문한 여왕 같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가 파산한 이후에도 잘 나갈 때 사귀었던 친구들을 종종 만났다. 예전엔 그 자리에 예쁜 옷을 입힌 나를 데리고 갈 때도 있었으나 파산 이후엔 오로지 뽀삐만을 안고 나갔다. 곱게 털을 빗고 예쁜 핀을 꽂은 뽀삐와 걷는 엄마는 등을 어색할 정도로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나는 아빠의 파산 이후로 더 못생겨졌다. 갑자기 단칸방으로 쫓겨나며 제대로 먹고 씻지도 못한 탓이었다. 엄마가 뽀삐의 털을 수십 번씩 빗어내리는 동안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머릿니를 들켜 자로 손등을 맞았다. 그 뒤로 나는 엄마 몰래 뽀삐의 귀 털을 조금씩 뽑았다. 엄마는 내 입가에 버짐이 피는 것은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뽀삐의 귀 털이 줄어드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그러나 원인이 나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뽀삐는 나만 보면 도망을 다니다가 나중엔 내가 어떻게 꼬집고 괴롭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 잠을 잤다. 그러다 갑자기 죽어버렸다. 엄마는 더 이상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곰팡이가 핀 매트리스 위에 꼼짝 않고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더 이상 텔레비전을 봐도 웃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도 죽고 나중엔 아빠도 죽고 결국 나도 죽었다는 지겹고 뻔한 이야기. 그리고 이렇게 나는 개가 되었다.

뽀삐라는 이름을 얻어 처음 이 집에 온 날, 나는 진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진아에게서 내가 알던 뽀삐의 냄새가 났다. 귀 아래로 하늘거리는 머리칼도 뽀삐와 같았다. 동그랗고 맑은 눈망울도 그대로였다. 진아는 나를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심지어 손을 뻗어 날 만지려 했다. 그 뽀삐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다니. 그 뽀삐가.

새로운 뽀삐로 살며 나는 이전의 삶에서 원했던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 쾌적한 보금자리, 과도한 애정과 관심, 양질의 식사와 관리. 손에 잡힐 듯 빠져나갔던 모든 것이 정확히 제 자리에 돌아와 있다. 정말 신이 있어 내 기도를 듣고 세세히 목록을 만든 다음 하나하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이런 상황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원하던 것을 다 얻었는데 기쁘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 우리집 뽀삐는 어땠을까?

아줌마가 잠에 들자 진아가 다시 방에서 나왔다. 진아는 이전의 나처럼 못생기지 않았다.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성실하다. 다만 아줌마가 바라는 대로 전교 1등을 하진 못했다. 매일 딴 길로 새는 일 없이 열심인데도 아줌마는 진아를 칭찬할 줄 모르고 진아는 반항할 줄 모른다. 아니, 내 간식을 길고양이한테 줘 버리는 정도의 반항을 할 뿐이다. 거실 장식장에 내 사진이 가득한데 진아의 사진은 거실에도, 안방에도, 진아의 방에도 없다. 진아는 천천히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낸 뒤 컵에 소리 나지 않게 물을 따른다. 물을 마시다 말고 연신 눈가와 볼을 문지른다. 그러다 문득 진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부엌 가위를 집어든다. 진아가 조용히 내게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