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긴 휴일을 맞은 정민 씨가 평창동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리는 전시 관람을 제안하기에 흔쾌히 그러자 했다. 여기서 ‘흔쾌히’란, 평상시의 내가 도통 여유 시간을 전시 관람에 할애하는 타입의 사람이 아님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말이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정민 씨가 먼저 전시 관람을 제안하고 미술대학을 졸업한 내가 수동적으로 응하는 데에는 혹시 ‘관람’에 대한 다른 잣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야 생각해 본다.
전시를 ‘본다’는 건 뭘까. 전시장에 도착해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벽면에 붙은 뭔가를 흘끔흘끔 보고, 때로는 핸드폰을 꺼내 찍다가 어느새 화살표를 따라 전시장 밖으로 나오는 것이 관람의 처음과 끝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더 넓게 보자면 취향에 맞는 전시를 찾아 검색하고, 정보를 확인해 관람 예약을 하거나 주변의 맛집을 찾아두어 전시장을 나선 뒤의 동선까지를 준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철저한 사람이라면 전날 밤 전시 관람용 의상을 미리 꺼내놓을 수도 있다. 이후 인스타그램에 벽에 걸린 뭔가를 보고 있는 뒷모습 사진을 업로드하고 해당 전시의 이름을 해시태그로 달면 비로소 ‘관람’이 끝이 난다. 그 게시물에는 전시에 대한 감상보다 관람 후 먹은 음식 이야기 비중이 더 높은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관람을 피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기승전결이 탄탄한 관람이다. 운 좋게도 전시장에 찾아가 눈으로 작품을 보는 것까진 쉬이 할 수 있다. 문화자본이 많은 서울 도심에 거주하며 이동이 쉬운 몸을 가진데다가 관람에 들일 여유 자금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러나 영화든 책이든 전시든 뭔가를 봤다면 누군가 감상을 물었을 때 다섯 문장이라도 내 방식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재미있었다’, ‘볼 만했다’, ‘괜찮던데’ 같은 희미한 말을 제외한 나만의 감상 말이다. 그런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관람 후 필히 정적인 시간을 곁들여야 한다. 전시장에서 모은 시각 정보와 팸플릿 등에서의 활자 정보를 교차해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엮는다. 그것을 소화한다면 비로소 나만의 감상을 배출할 수 있다. 뭔가를 섭취했다면 소화해 배출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 아닌가. 관람 후 자신 있게 감상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내겐 휴지 없이 코를 푸는 것처럼 찝찝한 일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전시를 보지 않는 쪽이 더 속 편하다.
그런데 매번 전시를 볼 때마다 그렇게까지 부산을 떨어야할까? 붐비는 인파를 뚫고 전시장에 도착해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무사히 귀가해 나만의 이야기를 엮고 소화해 감상을 배출하기까지 드는 물리적 시간과 에너지가 내게 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전시를 꼼꼼히 소화하고 싶다는 욕심과 한정적인 무형 자산에 쫓겨 전시 관람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이보다는 겉핥기식이라도 관람을 한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작가의 아이디어를 즐기고 오는 사람과 마무리에 집착하느라 관람의 빈도를 줄이는 사람 중 문화 자본을 더 잘 누리고 있는 쪽을 누구로 꼽을지는 개개인의 가치관에 달렸다. 나 역시 아무 갤러리나 가서 아무 전시나 보고 아무거나 찍고 밥만 맛있게 먹은 뒤 돌아올 때가 많았다. 거기에서 집어온 팸플릿은 두 번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전시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날은 즐거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전시 덕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날 친구와 나눈 대화가 더 오래 남았다. 다른 이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런 겉핥기식 관람이 내게 도움 되는 것은 전혀 없다. 시간이 흐른 뒤 핸드폰 앨범에서 우연히 전시 작품 사진을 발견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듯이.
그렇게 전시를 일 년에 열 번 이내로 관람하는 뻣뻣한 사람이 되었지만, 이번 정민 씨의 제안에는 구미가 당기는 데가 있었다. 바로 평창동의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까지 두 발로 걸어서 가자는 것. 김밥 두 줄과 텀블러에 담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찬통에 담은 시원한 배를 가방에 모두 넣고, 등산화를 신은 뒤 쌍안경을 챙긴다. 그리고 집 뒤로 산등성이를 따라 평창동으로 넘어간다.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닿을 것이다. 만약 가는 길에 처음 보는 새를 발견한다면 더 오래 걸릴 테고. 오히려 기쁜 일이지. 한동안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르면서 답답했다. 대중교통에 실려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내릴 때를 놓칠까 신경 쓰기보다 이렇게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를 때 산을 걸으면 개운하고 즐거울 것이다. 그 예상은 깔끔하게 들어간 3점 슛처럼 적중했다.
북악산 숙정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걸었다. 누리장나무의 낮은 가지 끝, 꽃잎처럼 펼쳐진 다섯 갈래의 붉은 꽃받침 위에 동그랗고 검푸른 열매가 열렸다. 넓고 둥근 물오리나무 잎은 벌레에게 뜯겨 잎맥만 그물처럼 듬성듬성 남아있었다. 나무가 손가락 끝을 벌린 곳마다 거미집이 있었다. 어떤 무당거미의 집에는 유난히 굵고 긴 줄이 한 축을 붙들었다. 그것에 대들보 줄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작은 흰 달걀이 주렁주렁 열린 듯한 때죽나무 열매를 곤줄박이 한 무리가 신나게 쪼아대고 있었다. 양 발 사이에 열매를 붙들고 부리로 콕콕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숲을 울렸다. 배가 무겁게 부른 암컷 사마귀들이 느릿느릿 성벽의 돌 위를 걸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김밥과 배를 먹었다. 햇빛은 속옷까지 살균해 버릴 만큼 구석구석을 바싹 비추었다. 고개를 돌리면 아주 먼 곳의 산등성이까지 볼 수 있었다.
청운대 쉼터에서 능금마을로 향했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능금마을에 능금과 자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작고 맑은 물길이 집 사이를 따라 졸졸 흘렀다. 우리 집도 꽤나 외진 마을에 있지만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전쟁이 벌어져도 모르고 살 것만 같은 조용한 곳이다. 산기슭을 따라 가지런히 모인 햇빛을 받아 배추가 굵게 자라고 있었다. 개울 옆엔 도롱뇽과 버들치가 살고 있으니 조심해 달라는 팻말이 있었다. 도롱뇽과 버들치라니 신기하면서도, 방문객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 작은 개울에 팻말까지 붙었을까 걱정이 됐다. 자연을 아끼는 사람들이 방문하길, 그래서 오래도록 이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랐다. 물이 흐르는 대로 걸으며 수면에 닿자마자 잘게 흩어지는 빛을 보았다.
거기까지가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능금마을에서 시작된 작은 개울은 점점 넓어져 백사골의 백사실계곡이 되었다. 백사실계곡의 주위 풍경도 아름다웠으며 그 일대는 2009년 이래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에서 밤송이가 투두둑 떨어졌다. 그 광경이 멋지고도 겁나서 얼른 셔츠를 머리 위로 덮었다. 나무 사이로 어치 세 마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런데 그 곁에 나이 든 부부와 딸이 쪼그려 앉아 바닥에서 주워 든 뭔가를 가방에 허겁지겁 담고 있었다. 아마도 도토리와 밤인 것 같았다. 어치들이 가을 동안 숲 곳곳에 숨긴 도토리는 어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야생 동물들의 겨우내 먹이가 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 가족은 나무 아래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고 있다.
“여기 야생동물도 먹어야 되는데 다 가져가면 우째요.”
지나치려다가 결국 한 마디 했는데 아주머니와 딸은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아저씨 역시 들은 체 만 체. 먹을 것 없어 굶는 시대도 아니건만 그 많은 도토리와 밤을 어따 쓰시려고 저러나. 어치 세 마리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나무에 걸려있었다.
‘임산물 채취금지 - 산림 내 밤, 버섯, 도토리, 매실 등 임산물 무단 채취 또는 절취할 경우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3조에 의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을 알려드립니다.’
저 셋이 글을 읽지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하며 몹시 굶주린 사람들이길 바랄 뿐이었다.
더 걸으니 갑자기 사방이 환해지며 절이 하나 나타났다. 백사실계곡은 여기서 백석동천으로 변해 현통사 앞을 흘렀다. 백석동천이 졸졸 흐르는 옆으로 사람 사는 집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안방 창문을 열면 흐르는 물이 보일 정도였다. 집 사이로 이렇게 가까이 천이 흐를 수가 있다니. 게다가 그 소리와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집집마다 문 밖에 가득 꺼내놓은 화분에 꽃이 만개해 있었다. 작은 새 같은 박각시나방이 부지런히 꽃과 꽃 사이를 날았다. 입을 벌리고 이 광경에 놀라는 와중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쓰인 팻말을 발견했다.
‘백사실은 무릉도원입니다.’
참말이었다. 집들은 곱게 손질되어 있고 화분은 버려진 것이 드물며 어느 댁 마당의 대추나무엔 새들이 먹다 반쯤 남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능금마을에서부터 백사실계곡과 현통사 아래 동네에 이르는 길이 전부 무릉도원이었다. 북악산을 통과하는 동안 한국의 서울이 아닌 신비한 세상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 물길은 땅 아래로 사라졌지만 곧 홍제천이 다시 나타났다. 맑은 물이 널따란 돌 위로 천천히 흘렀다. 청둥오리 수컷은 화려한 번식기 깃털을 벗고 수수한 모습으로 깃털갈이 중이었다. 아이들이 천에 들어가 물장구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인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