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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627 화 / 물 먹는 마음 / 긴개 본문
서른세 번쯤 다시 태어났을 무렵의 일이다. 유예했던 불안이 마감 기한을 알리러 찾아왔다. 똑똑똑,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똑똑똑,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똑똑똑, 모르는 체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모르는 체하는 것으로 사라질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불안은 끈질기게 내 뒤를 지킨다. 어디든 가보세요. 어디든 따라갑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던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일어나도록 만들어드립니다. 불안은 떠올리는 만큼 힘을 얻는다. 점점 실제에 가까워진다. 피하고 싶던 일이 결국 벌어지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눈을 마주쳐버린다면 불안이 내 손을 잡고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가리라. 나약함 때문에 운명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그까짓 거 믿을 필요 하나 없다고 소리치는 마음속 목소리에서도 나는 불안을 읽어낸다. 눈을 희미하게 뜬다. 장송곡의 클라이맥스를 최대한 흐릿하게 떠올리려고.
옆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쭙쭙 빠는 중년의 남자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입 주변에 묻은 소스를 게걸스럽게 핥는 소리가 귀에 닿는 것만으로 당장 샤워를 하고 싶어 진다.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다. 행인들 크로키나 해볼까 하고 앉은 카페 2층 창가 자리에선 사람들이 버스에 가려지는 통에 머리 윤곽선만 그리다 말았다. 처음 와본 동네가 낯설어 일부러 익숙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골랐다. 풋살화 중고거래를 하러 들른 참이었다. 친구 덕에 풋살 경기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 일요일 저녁 실내 풋살장에서 모일 것이다. 친구는 새것은 비싸니 5만 원 이하의 중고로, 평소보다 한 치수 크게 사라는 풋살화 구매 팁까지 전해주었다. 못 미더운 브랜드의 새 풋살화를 쿠팡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것인지, 이름난 브랜드의 중고 풋살화를 당근마켓에서 저렴하게 구매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여기에 와 있다. 새로운 운동에 도전할 때마다 운동복과 물품 등을 새로 장만한 뒤 느끼는 죄책감도 오랜만이다. 꾸준히 다니던 발레는 일본 여행을 계획했을 때 중단했는데 이후 호두의 병을 발견하며 두 달째 쉬게 되었다. 운동을 그만두니 생활의 균형이 흔들린다. 주기적으로 몸을 격렬하게 달구고 싶다. 여럿이 모여 팀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오랜만이다. 발레와 요가는 한 공간에서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각자의 내면에 침잠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다. 축구는 다른 성질의 운동이니 느슨해진 몸에 새로운 활력을 주려나. 지금 너무나 절실한.
더위가 시작되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매년 여름, 뭘 먹고 기력을 차릴지 고민할 만큼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사라진다. 식사의 조건이 더욱 까다로워진다. 좋은 사람들과 완벽한 음악, 청결한 식당, 부족함 없는 맛, 섬세한 직원 등등. 반대로 겨울엔 그저 따뜻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입맛이 떨어질 때는 보통 의욕도 함께였다. 여름 여행을 부산스럽게 떠나본 적 없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내 몸에서 흐르는 땀을 더럽지 않다고 느끼게 되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강렬한 햇살에는 폐쇄공포를 느낀다. 잔인하게 내리쬐는 한낮에 갈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연락해 볼까.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 주변의 시공간을 뒤엎어버릴 사람에게. 그런 사람은 이제 없다네. 없은 지 오래.
느닷없이 가랑이부터 허벅지와 오금을 거쳐 발목까지 빨갛게 두드러기가 났다. 원인은 모른다. 모기인지 음식인지 음악인지 업무인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유를 안다고 뭐가 달라져? 두드러기의 원인은 알 필요가 없다. 그냥 훌러덩 바지를 벗고 피부를 시원하게 내버려 둬야 한다. 무심코 긁어도 안 된다. 손톱으로 벅벅 긁었다가는 지뢰 게임에 걸린 것처럼 주변으로 잽싸게 퍼져나간다. 울긋불긋한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자국이 남으면 그 위에 문신을 해야겠다고. 두드러기가 퍼져나간 자리가 넓다. 이 정도라면 그랜드피아노를 옮겨놔도 되겠어. 다리를 올려놓으면 누군가 연주를 할 수도 있게.
우울도 오랜만이다. 가끔 나는 과거의 우울을 까맣게 잊고 생기발랄하다. 뒤늦게 떠올릴 때면 그동안의 크로니클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때문에 조금 놀란다. 오래전 출발한 열차가 이제야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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