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619 월 / 고양이는 죽었냐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619 월 / 고양이는 죽었냐 / 긴개

긴개 2023. 6. 20. 00:28






그래, 고양이는 죽었냐? 집을 나서며 만난 동네 할머니한테 인사를 했더니 돌아온 말이다. 어딘지 섬뜩한 이 말은 사실 비아냥대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오히려 걱정 어린 눈망울로 인사하는 할머니로부터 나왔다. 우리 집 첫째 고양이 호두가 간암으로 병원에 다니며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동네 할머니들은 나를 볼 때마다 고양이의 안부를 묻곤 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대개 저런 투였다. 나는 그 말의 어감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 말을 건네는 정감 어린 표정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다른 누군가가 저런 말로 내 고양이 안부를 묻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메다꽂는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이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기에 싸우는 중인가 귀 기울여 들어보면 저 뒷마당 상추 좀 뜯어가라, 안 묵는다 됐다, 아 가져가라 안카나 같은 소리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호두는 여전히 우리 집 첫째 고양이로서의 본분을 다 하고 있다. 셋째 강아지 란마가 산책에서 돌아오면 무심한 듯 다가와 란마의 온몸에 실려 온 바깥 냄새를 킁킁대며 안부를 확인한다. 둘째 고양이 째즈와도 밥그릇 앞에 나란히 앉아 차례를 지키며 사이좋게 배를 불린다. 잠자리에 누우면 내 머리맡에 찰싹 붙은 채 그르릉대며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점점 더 베개를 넓게 차지하며 내가 바닥으로 내려가도록 밀어낸다. 덕분에 목이 계속해서 뻐근하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머리맡을 지켜주는 의리만큼은 무엇에도 비길 바가 없다.

파수꾼 할머니들은 마을 어귀의 정자에 앉아 하루종일 망을 보고 있다. 정자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고 돌아올 때는 이 파수꾼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이 중 담배를 물고 말하는 모습이 쿨 해 보여 남몰래 쿨매라고 부르는 할머니가 있는데, 쿨매는 내가 매주 고양이를 모시듯 안고 병원에 가는 꼴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여자가 애를 배야지 맨날 고양이 새끼한테 돈을 그렇게 쓰나. 매번 담배를 문 채 호통을 쳤다. 쿨매 나이가 여든은 되었으려나. 여든이면 지금이 2023년이니 1940년대쯤 태어나셨겠지. 태어나 걷고 뛸 무렵 일제강점기가 끝났을 것이고 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을 것이다. 매사 굶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우며 유소년 기를 보낸 할머니들 눈에 고작 고양이 한 마리 살려보겠다고 귀한 돈을 내다 버리는 젊은 여자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우리는 비교적 단기간에 유달리 깊은 세대 간의 간극을 지닌 사이가 아니던가. 그래, 정말 호두한테 쓰는 돈을 사람 하나 살리는데 쓸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이 할머니들 같은.

호두를 안고 마을버스에 타 병원에 가는 동안, 나는 고양이 대신 할머니 한 명을 입양해 키우는 상상을 했다. 노인복지 차원에서 반려동물 대신 갈 곳 없는 노인을 집집마다 데리고 살도록 짝 지어주는 정책이 시행되고, 우리 집에 낯선 노인 한 명이 온 거야. 조용하고 아늑한 집에 어느 날 온통 쪼그라든 몸에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 노인이 배달된 거지. 노인은 나와 잘 지내보려 나름대로 노력하겠지만 그 모든 노력이 역지사지 없는 일방통행일 뿐이라 소중하고 작은 집은 점점 좁아터진 감옥이 되어가는 거야. 밥 한 끼 같이 하는 것마저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고역이 되고, 잠들 때 서로의 소리가 거슬려 밤새 머리를 쥐어뜯는.

이 불쾌한 상상은 내게 호두가 고양이로서 주는 따뜻함과 보드라움, 상냥함, 인내, 애정, 신의가 얼마나 귀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했다. 호두와 함께 사는 것과 낯선 인간 한 명과 사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는 굳이 적을 필요도 없다. 고양이나 개와 함께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라고 해봤자 충분히 상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 한 명과 살며 겪을 수 있는 괴로움은 그보다 훨씬 폭넓고 기상천외하다. 고양이와 개 때문에 인생을 말아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는 말이다. 반면 인간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금 호두를 위해 병원비를 쓰는 것은 보다 확실한 행복을 위한 지출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보답받을 일 없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아마 호두와 나의 마음을 가늠한다면 분명 호두가 나를 생각하는 쪽이 더 진하고 깊다. 나는 말로도 행동으로도 호두보다 애정 표현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는 상호적인, 게다가 내 쪽이 더 빚지고 있는 관계. 고작 고양이 한 마리가 아니다. 이 고양이 한 마리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도대체 몇이나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