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단편소설] 충매화 / 긴개 / 0716 본문

2021-2023 긴개

[단편소설] 충매화 / 긴개 / 0716

긴개 2023. 7. 18. 22:57






그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길을 잃었다. 어디에 가려던 것인지 아닌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거센 바람이 빗줄기 허리를 감아 휘몰아친다. 흘러내리는 빗물에 힘겹게 눈을 떠도 사방이 어두워 주위를 분간할 수 없다. 소란스러운 어둠에 귀가 먹먹해졌다.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내게 끝이 온다. 내게 곧, 끝이. 눈앞에 투명한 막이 생긴 듯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비좁은 주머니에 온몸이 갇혀 버린다.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빠져나갈 수 없게 몸을 감싸버린 주머니 속에서 그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친다. 주머니는 부드럽고 단호하다. 두려움에 폐가 쪼그라든 그가 헐떡이며 팔다리를 마구 뻗는다. 점차 온몸에 힘이 빠진다. 내려다보니 그의 팔다리 끝은 어느새 녹아내려 뭉툭해져 있다.


눈을 뜨자마자 충렬은 핸드폰을 켰다. 새벽 네 시 이십 분. 또 같은 꿈을 꾸고 말았다. 씨발 사기꾼 새끼들. 이 개 같은 꿈. 그의 심장이 불안할 정도로 크게 쿵쿵 댔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방금 꾼 꿈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다. 충렬은 한참을 씩씩 대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아 누웠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뻣뻣해진 몸은 스르르 풀어질 기미가 없다. 귓불처럼 부드러운 이불과 이름에 마약이 붙은 베개도 그에게만은 효과가 없었다. 그전에 내다 버린 수많은 침구 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잠은 쉬이 이어 붙지 않는다. 어둑했던 방 안은 기어이 환해지고 말았다.


불면증이 충렬의 밤을 쫓기 시작한 것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그가 밤새 침대에서 불편하게 뒤척이며 시간을 죽이다가 결국 피곤해 잠이 들면 주머니 꿈을 꾸었다. 길 잃은 밤, 시야가 흐려지는 것에서 그치던 악몽은 주머니에 완전히 몸이 갇혀버리는 장면으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그 속에서 팔다리가 녹아내리기까지 했다. 처음엔 커피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커피 한 잔만 마셔도 가슴이 쿵쿵 뛰고 밤에 잠이 안 온다던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나. 충렬은 매일 두세 잔씩 마시던 커피를 단박에 끊었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몸에 아직도 카페인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헹궈야지. 몸에는 순환하는 물이 있는데, 이것을 깨끗하게 만들려면 깨끗한 물을 많이 마시고 더러운 물은 밖으로 빼줘야 해. 그는 제멋대로 내린 처방에 따라 하루에 물을 일 점 오 리터씩 마시고 주말엔 사우나에 갔다. 그래봤자 화장실만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고 저혈압 때문에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휘청거릴 뿐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주일 넘게 잠을 설치자 충렬도 조급해졌다. 겨우 해가 뜰 때 잠들었다가 출근 시간이 지나서 깬 것이 세 번째 되던 날에는 상사가 화를 내지도 않았다. 뭔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근한 말투로 잘 해결하고 오라고 말했는데 도리어 그가 어리둥절해졌다. 뭘 어떻게 해결하란 말인가. 그러나 곧 몽롱해졌기 때문에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충렬은 그가 아는 한 늘 잘 먹고 잘 잤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급식 한 번 남긴 적이 없었다. 추어탕을 먹고 헛구역질하는 친구들 옆에서도 그는 밥알 하나 남기지 않았다. 수험생 시절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누워서 눈을 감으면 되잖아. 그리고 아침에 눈 뜨면 되고. 친구들은 혀를 찼다. 너는 걱정이란 게 없냐? 야, 사람이 불안하면 잠이 잘 안 와. 충렬은 친구들이 수험생이라고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 괜히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눈 감으면 자는 거고, 눈 뜨면 깨는 거지. 오버하기는.


그 친구들은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잠이 안 와 미치겠다며 투덜대던 친구들이 결국 어떤 방법으로 잠을 청했는지, 충렬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을 떠올리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잠을 설친 지 한 달이 지날 때부터는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은 또 무슨 수로 밤을 보내야 하나. 게다가 이제는 가만히 누워있으면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긁을 수 있는 피부가 간지러운 것이 아니다. 몸속 어딘가에서 살금살금 간지러운 느낌이 솟아올랐다. 뼈에서 감각을 느낄 수가 있나? 근육이 간지러울 수가 있나? 그는 혼란스러웠다. 불면증과 간지럼증이 서로 관계가 있을 것 같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몸을 벅벅 긁다가 잠에 들면 또다시 몸을 옥죄는 주머니에 갇혀 발버둥 치는 밤을 지새운 충렬은 결국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상사는 충렬이 반차 소식을 알리고 사무실을 나서는 동안 그의 붉어진 목덜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더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갑자기 주변 환경이 바뀐 것도 아니고,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다는 충렬의 말을 듣고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지금 눈의 충혈 말고는 별다른 증상이 없습니다. 달리기 같은 운동도 이미 저녁에 해봤다고 하셨고, 카페인 음료도 끊은 지 좀 되었다고 하셨죠.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잠이 안 오는 거라면 큰 병원에서 제대로 검사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로 짐작 가는 일이 정말 없으신 거죠?”

충렬이 대답했다.

“네, 없다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너무나 쪽팔렸다. 한 달 전 나리 씨에게 마음을 거절당한 일이 신경 쓰이긴 한다고. 하지만 잠을 설치는 이유를 그것으로 짐작하기엔 충렬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리 씨가 그의 고백을 직접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품고 있던 마음을 미처 전하기도 전에 꺾였을 뿐이었다. 사람이 고작 그런 일로도 불면증에 시달릴 수가 있나? 이런 이야기마저 탈탈 털어놓아야 할까 봐 충렬은 대학 병원 진료 예약을 망설였다. 그 대신 침구 세트를 바꾸고 저녁마다 상추를 씹기로 했다. 더 먼 거리까지 달리기를 하고 생전 사본 적 없던 배쓰밤까지 욕조에 풀어 공들인 목욕을 했다. 심지어 한동안 멀리 했던 자위로도 잠을 청해보려 했다. 그래도 밤이면 밤마다 주머니 꿈이 찾아왔다. 이제는 주머니 속에서 그의 몸이 녹으며 체액이 가득 차올랐다. 입과 코로 들이치는 체액에 충렬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또다시 해가 채 뜨기도 전에 그는 컥컥 호되게 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눈을 뜨면 온몸을 들쑤시는 간지럼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꿈꾸던 그대로]

낯선 광고가 초록색 버스 옆구리에 붙어있었다. 광고판 속에는 흰색 베개를 베고 흰색 이불을 덮은 여성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있었다. 출근길 버스정류장에서 붉은 눈의 충렬이 마주한 그것은 데일리드리머즈의 신제품 광고였다.

[사소한 일로도 잠을 설치는 당신, 잠자리가 바뀌면 적응하기 힘든 당신, 원치 않는 꿈에 시달리는 당신.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드리밍 이식으로 편안함을 꾸세요!]

눈이 번쩍 뜨이는 문구에 충렬은 바로 핸드폰을 켰다. 검색해 보니 데일리드리머즈는 최근 코스닥에 상장한 IT 분야 스타트업으로 신제품 드리밍 칩 덕분에 주가가 급격하게 오르고 있다는 뉴스가 가득했다. 드리밍을 대대적으로 소개한 뉴스 하나를 클릭했다. 목덜미를 살짝 절개해 새끼손톱보다 작은 칩, 일명 드리밍을 이식하면 반나절 만에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하며 바로 그날 밤부터 원하는 꿈을 꾸며 푹 잘 수 있다는 사측의 홍보 문구가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절개는 전혀 아프지 않으며 최신 접합 기술로 상처도 금방 사라진다. 드리밍 제거 역시 언제든지 무료로 시술 가능하며 부작용 사례는 지금껏 밝혀진 바 없다고 한다. 데일리드리머즈의 홈페이지에는 젊어 보이는 대표 이사의 사진 아래 과학적으로 양질의 수면을 제공해 궁극적으로 모두가 행복한 꿈을 꾸고 이루기를 기대한다는 인터뷰 일부가 발췌되어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벌써부터 칩 이식자들의 열광적인 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단잠이 절실한 수험생들, 공황장애로 괴로워하던 연예인 C, 갱년기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드리밍 덕분에 일상을 행복하게, 밤은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충렬은 출근도 하지 않고 곧바로 데일리드리머즈에 전화를 걸었다. 스타트업 회사에 벌써 열네 개나 되는 직영점이 있었다. 대부분 두세 달간의 예약이 가득 차 있었는데, 운 좋게 멀지 않은 지점에 당일 예약 취소자가 있어 한 시간 뒤 시술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충렬은 급하게 길을 건너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탔다. 지긋지긋한 밤 고생도 이제 끝이다. 도대체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왜 갑자기 불면증에 시달렸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는 데일리드리머즈로 향하는 버스에 탄 것만으로도 몹시 마음이 놓여 앉은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실장에게 간단한 이식 상담을 받은 뒤 프런트에서 두 달 치 월급을 결제할 때는 충렬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진작에 이식했더라면 쓸데없이 마약 베개나 배쓰밤 같은 걸 사느라 돈 낭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빠른 결단이야말로 돈을 아끼는 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이식 시술을 받은 뒤 돌아와 잠을 청했는데, 또다시 주머니 꿈에서 깨어나고 만 것이다. 이 개새끼들. 육백만 원에 이런 쓰레기를 사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충렬은 이를 갈았다.


아침이 밝자마자 충렬은 데일리드리머즈에 들이닥쳤다.

“시술 당일 곧바로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준다면서요? 바로 어제 했습니다. 근데 지금 이 눈 좀 보세요. 또 잠 설쳤습니다. 밤새고 바로 여기 온 거예요. 당장 환불하세요.”

불면증은 그의 인내심을 빠르게 소진했다. 상담을 담당했던 실장은 당황한 표정이면서도 친절했다. 충렬이 시달렸다는 꿈의 내용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들었다. 충렬은 몸을 벅벅 긁으며 주머니 꿈 이야기를 토해냈다.

“곧바로 본사와 논의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장은 날다시피 달려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오며 말했다.

“십 분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충렬은 대기실의 소파에 축 늘어졌다. 더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상대도 없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는 갑자기 심한 허기를 느꼈다. 실장이 가져다 둔 커피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몇 달 만에 식도를 통과한 카페인이 빠르게 온몸에 퍼져갔다.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 뛰자 충렬은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물을 마실 걸. 생각 없이 커피를 들이켠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 짜증은 억울함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냐. 뒤이어 나리 씨에게도 생각이 미쳤다. 나리 씨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며 등을 벅벅 긁었다.


나리 씨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운동화에 원피스 차림을 즐기고 네모반듯하게 단정한 가방을 멨다. 잔머리 없이 깔끔하게 머리를 모아 묶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맑았다. 충렬은 회사에서 나리 씨가 밸런타인데이에 건네준 초콜릿을 먹고서부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혹은 그저 나리 씨가 예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렬은 스스로 그때의 초콜릿이 사랑의 시작이라 여겼다. 알고 보니 초콜릿은 회사 같은 층 사람들 대부분에게 의례적으로 선물한 것이었으나 충렬은 개의치 않았다. 만약 자신을 싫어했더라면 이렇게 맛있는 초콜릿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초콜릿은 달콤했다. 달콤해서 그것을 먹는 내내 나리 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출근한 다음에는 나리 씨가 지금쯤 회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퇴근 후에는 나리 씨의 SNS 계정에 들어가 새로 올린 사진과 함께 찍힌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만나는 듯한 남자는 없었다. 대부분 학교 동창이거나 동아리 친구, 알바 친구 등이었다. 나리 씨는 참 친구도 많다. 충렬은 집에서 혼자 배달 음식을 먹으며 중얼거렸다. SNS에 올라온 모든 사진을 여러 번 훑고 난 뒤엔 그의 친구들 이름마저 외울 지경이었다. 가장 자주 만나는 듯한 윤경, 든든하다며 힘든 일 있을 때 의지한다는 다미, 예쁜 카페의 맛있는 디저트를 함께 찾으러 다니는 지운. 충렬은 문득 나리 씨가 그들을 자신에게 소개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 남자친구야, 충렬 씨라고. 그는 멋쩍게 웃으며 나리 씨의 친구들에게 비싼 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할 것이다. 미리 계산을 하고 먼저 자리를 피해 주면 친구들에게 나리 씨가 날 자랑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자리가 파한 후 나리 씨의 SNS에 자신의 계정이 태그 된 사진이 올라올 것이다. 친구들은 댓글로 충렬 씨 다음에 또 봐요, 덕분에 식사 맛있게 잘했네- 하고 말 걸어줄지도 모른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상상은 백화를 떠올리는 데에서 덜거덕 멈추고 말았다. 그도 나와 나리 씨가 있는 식사 자리에 나타날까? 백화는 나리 씨가 종종 바에서 위스키를 마실 때 함께 태그 하는 사람이었다. 충렬은 그가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 속 백화를 쳐다보는 나리 씨의 표정이 마뜩지 않았다. 나리 씨는 백화 옆에서 평소 충렬이 보던 것과는 다르게 어딘가 그렁그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십 분 보다 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실장이 대기실에 늘어져있던 충렬을 불렀다.

“우선 답변이 늦어져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지금까지 저희 데일리드리머즈에서 드리밍 부작용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한 마케팅 문구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칩 이식 후 모든 실험자가 양질의 수면을 취해왔기에 저희 역시 확신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실장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현재 충렬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드리밍 최초의 부작용 사례가 될 수 있기에 오히려 데일리드리머즈에서 소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본사의 판단이 있었다. 원하는 병원을 지정하면 그곳에서 부작용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도록 모든 의료 지원에 힘쓰겠다. 입원비와 입원일 동안의 보상금 역시 최대한 지원할 것이다. 부작용 발생 사실을 외부에 밝히는 것도 충렬의 자유다. 일어난 사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데일리드리머즈에서도 원하지 않는다. 입원 가능 날짜를 알려주면 바로 수속을 도와줄 수 있다. 실장은 말을 마치며 충렬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의 답변이 자신이 원하던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돈도 주고 공짜 검진도 해준다니 당장은 더 요구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충렬은 흰색 건물을 나와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한낮의 태양이 버스 창문을 뚫고 충렬의 눈꺼풀을 쪼아대었다. 눈을 감고 간질거리는 몸을 벅벅 긁었다. 이제 병가를 내면 나리 씨도 한동안 못 보겠네. 그는 나리 씨를 마지막으로 본 때를 떠올렸다. 퇴근 후 나리 씨의 단골 바에 가본 날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척 술 한 잔 살 생각이었다. 비싸서 모셔두기만 했던 카키색 셔츠도 꺼내 입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가게 메뉴판 사진을 찾아보고 주문할 술의 이름도 외워 두었다. 바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충렬은 백화의 옆모습을 보았다. 맞은편엔 고개를 수그린 듯한 나리 씨가 앉아 있었다. 충렬은 조심스럽게 그들과 가까운 테이블로 가서 등을 돌리고 자리를 잡았다. 그는 처음으로 나리 씨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미안해.”
“아냐, 그게 아니라, 내가 좀 놀라서 그래. 일단 말해줘서 고마워. 나 지금 바로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니지? 생각할 시간 좀 줘, 알았지?”

백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긴 머리를 휘날리며 바에서 나갔다. 그날 나리 씨의 SNS 계정에는 아무런 사진이 올라오지 않았다.

나리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충렬은 알 것 같았다. 백화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이미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부정했던 가설이 사실로 판명 나는 순간이었다. 주머니 꿈이 시작된 것은 그날 이후였다. 주변이 흐려지고 희뿌연 막이 온몸을 감싼다. 그 속에서 충렬은 발버둥 치지만 탈출할 수 없다. 문득 몸을 내려다보면 손가락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녹아내리고 있다. 체액이 주머니 속에 점점 차올라 이윽고 그의 코와 입으로 파고든다. 몸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주머니 속에서 찰랑거리는 녹색 액체만 가득할 뿐이다. 충렬은 이제 그 꿈이 두려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병가 요청서를 받아 든 충렬의 상사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뭔가 방법을 찾은 거지?”

충렬은 팔뚝을 벅벅 긁었다. 머뭇거리다 예, 뭐 하고 얼버무리자 상사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자리에서 따로 챙길 짐은 없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실장이 준 명함을 꺼내 내일부터 바로 입원 가능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책상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던 물품들을 서랍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문을 나서려는 그때, 등 뒤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요.”

충렬은 나리 씨가 예뻐서 새삼 놀랐으며 그가 자신의 근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볼 일이 있어 반차를 냈다는 나리 씨와 충렬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는 무심코 팔을 벅벅 긁다가 그 소리가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요란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주먹을 꽉 쥐었다. 둘은 말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서 있었다. 나리 씨를 흘끔거리던 충렬은 그가 멘 가방 안에 자신에게 준 적 있던 초콜릿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 층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그는 그 초콜릿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나와 로비의 회전문을 통과하던 순간, 충렬은 앞서 있던 나리 씨의 가방에 손을 쑥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곧바로 초콜릿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리 씨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가장 놀란 것은 충렬 자신이었다. 나리 씨가 나중에 초콜릿이 사라진 걸 알면 자신을 의심할 텐데, 도대체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자신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나리 씨에게서 다시 초콜릿을 받아 기쁘기도 했다. 물론 나리 씨는 그런 적이 없지만….


집에 돌아온 충렬은 샤워를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몸에는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피로가 석고붕대처럼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몸을 말리고 나니 참을 수 없게 졸음이 밀려왔다. 충렬은 침대 위를 기어가 팔다리를 쭉 뻗으며 누웠다. 허벅지를 잠시 긁다가 눈을 감았다.


녹색 액체가 가득한 주머니 속에 그가 있다. 몸은 전부 녹아 없어졌는데도 그는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거운 녹색 액체가 바로 그 자신이다. 이제 그는 자유롭다. 액체는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린다. 주머니 안에서 그는 매 순간 새로운 방향으로 흐른다. 빠른 흐름이 그를 들뜨게 만든다. 곳곳에 의도를 가진 와류가 생긴다. 휘몰아치던 곳에서 어느 순간 끈적하게 빚어진 반죽이 만들어진다. 반죽이 모이며 형태를 쌓는다. 투명한 연녹색의 형태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가볍고 새로운 형태가 태어났다. 이것은 새로운 그다.


그는 번데기를 뚫고 서서히 밖으로 나온다. 여기에는 시곗바늘이 하품을 할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구겨졌던 날개를 말리는 데에도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간다. 서늘하게 마른 날개는 어둠 속에서 꼿꼿이 솟아오른다. 한두 번 날갯짓을 하며 그는 비행도구를 점검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그에게 너무나 명확하다. 거실 소파에는 낮에 나리 씨에게서 훔쳐온 초콜릿이 놓여있다. 그는 초콜릿을 집어 들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바에서 스쳐 지나간 백화의 향기를 떠올렸다. 도시 어딘가에서 그 향기가 진하게 풍기고 있다. 밤하늘 아래 빌딩들 사이로 그가 팔랑 날아올랐다. 손에는 초콜릿을 꼭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