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529 월 / 호두 투병 일지(2)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529 월 / 호두 투병 일지(2) / 긴개

긴개 2023. 5. 29. 23:53






나는 잘 지낸다. 우리 집 첫째 호두가 간암에 걸렸지만 밥도 맛있게 먹고 잠도 푹 자고 웃기도 잘 웃는다. 마음 따뜻한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위로와 선물이 무색할 정도다. 이렇게 잘 지내는 모습은 내보이기가 민망하다. 자기 고양이가 아픈데 행복하게 지내는 주인이라니 정나미가 뚝 떨어져 멸시를 받을지도 모른다. 공감과 동정을 느끼는 뇌의 신경망이 전부 코털가위로 싹둑 잘리기라도 한 걸까. 나조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일까. 호두가 소중하고 고맙고 어쩌고 줄기차게 떠들어댄 사람이 나와 동일인물이 맞는가. 하늘은 무심하기도 하지. 호두 주인은 참 무심하기도 하지.


반려동물이 아플 때 재활이나 한방 치료 등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기초적인 검사와 진료만으로 인한 병원비가 얼마나 들 것인지 계산해 본 적 있는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족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개와 고양이 등의 의료 연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으리라. 몇 년 전만 해도 정보나 방법이 없어 치료를 포기했을 질환도 연구 결과의 축적으로 점차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도 그렇듯, 병의 원인을 진단했다고 해서 완치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에도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호두는 외부기관에 맡긴 검사 결과를 아직 받지 못한 상태이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악성 종양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역시나 완치는 장담할 수 없다. 반려동물을 위한 의료보험은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수준이다.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검사 및 진찰비 등이 벌써 3,360,620원에 달했다.


지난주 목요일 첫 번째 항암 치료를 시도했다. 호두에게 약효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원도 병행했다. 몇 시간 동안 주사로 항암제를 맞으며 경과를 확인하고 다음날 퇴원하며 결제한 병원비가 796,890원이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병원비 4,157,510원 돌파. 게다가 이제부터 장기전이 될 것이다. 얼마나 눈덩이처럼 불어날지 알 수 없다. 애초에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이 건넨 적도 없이 사라진 터라 썼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다만 호두가 아프다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월 말, 그러니까 지금쯤이면 도쿄에 가 있을 예정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해외에 갈 채비를 했다. 이 책 저 책 비교해 본 끝에 마음에 드는 도쿄여행 가이드북을 하나 골라서 가고 싶은 곳을 꼼꼼히 표시했다. 일정과 목적지, 동선, 예산 등을 구글 시트에 정리했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조류 도감을 한 권 사서 일본의 새들을 관찰할 생각이었다. 도쿄 국립과학관에서는 꼭 기념품을 사고 싶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골똘히 계산하며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호두가 진료를 받기 전이었다. 결국 표를 취소하며 이십만 원 가량의 수수료를 냈다. 병원비를 송금할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비행기표 취소 수수료는 아직도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의 무심함은 막대한 병원비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다.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좀 끔찍한데, 오히려 병원비가 비쌌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나도 호두에게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위로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치료비가 좀 들 텐데 앞으로 어떻게 진행하겠냐고 수의사가 조심스레 물었을 때 방법이 있다면 치료하겠다고 말하던 순간 은근한 안도를 느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금전적 지출에 각오했다. 그러니 호두의 병을 늦게 발견했다는 죄책감을 좀 해소해도 되지 않을까. 병원비 액수와 죄책감을 교환하려 든 셈이다. 무심함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가설도 첫 번째와 만만치 않게 끔찍하다. 지금 호두에게 드러나는 증상이 없기 때문에 질병의 심각성을 미처 실감하지 못한 것이다. 병원에 가기 전에도 그저 살이 좀 빠졌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호두는 지금도 진단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 먹고 잘 잔다. 아파서 헐떡이거나 괴로워 울지도 않는다. 화장실도 잘 간다. 심지어 똥은 크다. 여전히 애교도 많고 호두~하고 부르면 기꺼이 와준다. 밤새 머리맡에서 조용히 그르릉거리며 찰싹 붙어 지낸다. 약도 잘 먹는다. 처음엔 항생제와 진통제 알약을 억지로 먹이려 고생했는데, 나중에 보니 호두는 간식에 가루약을 섞어주기만 하면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원체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지 않아 두어 번 나눠 먹이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간식을 섞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귀를 쫑긋거리며 기대에 차 울어댄다. 진통제를 먹고 나면 졸음이 와서 인지 금방 잠들어버리는 탓에 이 역시도 그저 평화롭게 잠을 자는 듯 보인다. 전보다 가벼워졌을 뿐 질병의 증상을 크게 느끼지 못하니 금세 안심해버렸다. 핑계를 찾고 싶은 나는 겉으로 보이는 호두의 평온함에 쉽게 기대고 만다. 경각심과 불안함, 괴로움 등 마땅히 끌려다녀야 할 감정들에서 동떨어진 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보다 괴로우려면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한다. 병환이 심해져 통증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 호두가 떠나고 난 빈자리 등을 집중해서 떠올리면 괴로워진다. 하지만 지금 호두는 여기 이곳에 있다. 즐겁게 약이 섞인 간식을 먹고 찹찹 물도 마신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자느라 털이 눌린 채로 천천히 다가와 몸을 비빈다. 무릎에 올라와 야옹 댄다. 함께 하는 지금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행복하다. 지금을 떠나 미래를 두려워하기 싫어. 미래가 닥치면 그제야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 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