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501 월 / 아이클라우드 기반의 내면소통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501 월 / 아이클라우드 기반의 내면소통 / 긴개

긴개 2023. 5. 2. 01:45

 


 


 
  
 애인과 헤어질 것 같던 순간도 지금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울분이 폐를 쥐어짜던 순간에도 한숨 정도는 시원하게 내쉴 수 있었다. 또 어떤 비극은 비웃음만으로도 물리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입꼬리 양쪽에 무거운 추가 꿰인 듯 도무지 웃을 수 없다. 어깨 근육을 수축시킨 긴장이 가시질 않는다.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숨마저 스타카토로 조금씩 끊어 쉬었다. 삶의 ⅓ 분량이 통째로 삭제될 위기 속에서 나는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통을 양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칠 뿐이었다. 
 
 현대인의 자산 범위는 90년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폭으로 확장되었다.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화 같은 물질적 자산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의 기록과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적 데이터까지도 개인의 자산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데이터란 단순한 글 기록에서부터 금융 서비스 이용 기록, 선호 음악/영화 목록, 생필품 결제 내역, 미식의 취향, 작업물, 투자 내역, 개인적 이미지 등으로, 개인의 객관적 지표이자 자아의 정보화라고도 볼 수 있다. 머릿속 기억은 사건 직후부터 끊임없이 왜곡되고 희미해져 간다는 점에서 온라인상의 개인적 데이터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데이터가 모종의 이유로 소실되는 경우, 소유주가 받을 충격은 부분 기억상실을 겪은 환자가 받은 그것에 가히 가깝지 않을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극심한 충격 말이다. 
 
 데이터의 소실은 과거의 일부를 잃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과거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데이터의 편리함과 영원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바람에 소중한 경험을 하는 순간에도 이를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는 별도의 노력을 점점 더 들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오래도록 생생하게 되뇔 수 있도록 피부가 느끼는 온도, 눈꺼풀에 닿는 빛의 느낌, 냄새, 목소리, 표정, 살갗의 표면 등에 하나하나 집중해 돌에 새기듯 기억한다. 그러면 원할 때마다 몇 번이고 행복하게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개인 비서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휴대전화 덕분에 이러한 노력은 점점 잊히게 되었고, 데이터마저 소실되면 기억과 실제 기록 둘 다 잃는 결과가 생기고 만다. 
 
 나를 이 참담한 인식론적 위기에 빠트린 것은 무려 팔 년간 신뢰했던 애플의 데이터 저장공간 대여 서비스 아이클라우드였다. 말하자면 업무용으로 개인 맥북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패착이었다. 맥북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클라우드의 2TB 용량 서비스를 구독했으나 사용 속도 저하의 주범으로 꼽히는 시스템 데이터는 클라우드가 아닌 기기에 쌓이며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이에 log, cash, cookie 등의 파일 삭제가 해결 방법이라 판단하고 이 폴더 저 폴더 뒤지며 기기 용량 확보를 목적으로 휴지통을 채우다 보니 글쎄, 갑자기 사진앱 속 사진 순서가 뒤죽박죽 섞이고 말았다. 영 엉뚱한 파일을 건드린 모양인데 그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검색으로도 복원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아이패드와 아이폰의 사진앱 역시 아이클라우드 동기화 설정에 따라 맥북 사진앱과 동일하게 순서가 뒤섞이고 말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름답게 정렬되었던 수년 간의 기록은 한순간에 바닥에 쏟아진 47,097장의 퍼즐 조각이 되어버렸다. 당황한 채로 아이클라우드 사이트에 접속해 해결 방법을 찾다 보니 절대 자의로 삭제할 리 없는 소중한 사진들이 휴지통에 왕창 들어가 있는 것도 발견했다. 그것도 ‘29일 뒤 영구 삭제’라는 표시를 달고. 
 
 마치 사회보장기반 서비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애플과 아이클라우드 서비스가 내 발등을 찍고 있었다. 혹은 내가 아이클라우드의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외주를 맡겼던 회사가 야반도주한 것 같았다. 기억은 나의 경계를 구성하는 무형 자산이자 의식 구성의 핵심 기관이다. 기억이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 기억은 나의 과거를 재정립한다. 기억 상실은 개인의 본질을 뒤흔드는 심리적 재앙이다. 온라인 데이터의 상실이 기억과 기록의 상실이자 자아의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기반의 구조에 대해서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소중한 기록은 인쇄나 외장 하드 디스크 저장으로 소실 가능성을 줄여야 했다. 아이클라우드의 작동 원리를 세심히 알아둬야 했다. 무가치한 데이터는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중요도에 따라 분류해두어야 했다. 모처럼 데이터 사회의 시민이 되었으니까 경각심을 갖고, 미래의 데이터 관리법도 대비해야 한다. 순진했다. 아니, 멍청했다.
 
 애플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 해결 방법을 묻고 구글 포토 앱으로 데이터를 백업하며 나는 며칠 간의 괴로움에서 조금씩 빠져나왔다. 동네에 물난리가 나 집에 있던 앨범과 일기 등이 전부 못쓰게 되었다는 부모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 시절 열심히 모았던 버디버디와 싸이월드의 게시물들도 잃은 적이 있었다. 개인의 기록은 언제든 훼손의 위기에 놓여있다. 게다가 남들이 보기엔 평생 간직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집착을 내려놓고 정말 소중한 것들만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제발 그렇게 좀 믿어봐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