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220 월 / 심해 로맨스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220 월 / 심해 로맨스 / 긴개

긴개 2023. 2. 21. 01:27

 

 

 




 확실히 우리 사랑은 어느 단계를 넘어섰다. 처음 함께 식사할 때는 밥을 반 공기나 남겼었는데 말이다. 마주 앉아 밥을 먹다 말고 앞니에 고춧가루가 꼈는지 콧물이 흐르는지 눈곱이 꼈는지 얼굴이 번들거리는지 신경이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줄줄 흘리고 먹을까, 씹는 음식이 보일까, 한 숟갈 천천히 퍼서 살짝 벌린 입에 겨우 넣고 입술을 앙 다문 뒤 꼭꼭 씹어 꿀떡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넘겼다. 밥을 다 먹고 물을 마실 땐 입을 헹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빠르게 삼키느라 사레가 걸릴 뻔한 적도 있다. 연락이 오면 일 분 내로 답장을 하느라 하루종일 핸드폰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새벽 네 시까지 대화를 멈출 수 없어 몇 달 잠을 설쳤다.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졸리지도 않았다. 밀당 같은 연애학 기술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쪽으로 더 당겨 끌어오려고 매 순간 밧줄을 휘휘 돌리느라 바빴다. 

 

 이제야 만나다니 얼마나 아쉬운가. 몇 년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십 대의 당신은 어떤 가방을 메고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또 이십대 초반의 당신은 어느 식당에 가고 어느 거리를 걸었을까. 교정을 시작하기 전의 앞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귓불의 솜털은 어땠을까. 직접 낱낱이 보았다면 좋았을걸. 이미 지난날보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더 길 수도 있건만 그마저도 욕심이 날 정도로 당신이 좋았다. 처음 만나자마자 이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모든 친구들에게 떠들어댔다. 본가 주소를 묻기에 별생각 없이 알려주었더니 부동산 시세를 알아내어 우리 집 재산을 가늠하고 자기에게 용돈을 좀 달라던 연상남자에게서 충격을 받고, 아마 이제 나는 제대로 된 연애 상대는 영영 찾지 못할 거라고 한탄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연애 초반의 광기와 흥분은 기세 좋게 요동치다가 일 년 정도가 지나자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처음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3일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을만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 서로가 깊게 스며들고 나니 더 이상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는 떨리지 않게 되었다. 차라리 몰래 과자를 먹다가 들켰을 때가 더욱 짜릿하리라. 설렘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아쉽지는 않다. 오히려 만남을 시작할 때의 짜릿함만을 골라먹고 싶어 하던 탐욕스러운 과거의 나로부터 발전한 것이 기쁘다. 상대가 주는 안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내가 되어서 다행이다. 그만큼 변함없이 좋은 사람이어서 당신께 감사하다. 

 

 그러나, 늦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알아차린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제야 부랴부랴 손에 쥐고 있던 포도알 초콜릿을 서로의 입에 쑤셔 넣는 것으로 끝나기엔 무심의 정도가 극에 달한 것인지 혹은 너무 깊은 바다에 단단히 돛을 내린 것인지. 우리가 서로의 연애상대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화들짝 놀라기도 민망할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해피 발렌타인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