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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_평생 글 못 쓰기_엄정화 (24.8.21) 본문
이번 주 글방의 주제를 보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양쪽의 선택지 모두를 어려움 없이 실천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특히, 글을 쓰지 못해 괴로워하는 미친 사람이 있나(혹시 다정님)? 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고를 수 있다. 글을 쓰지 않고 책을 보면서 살 것이다. 내가 책을 그렇게 좋아해서는 아니고, 글쓰기가 더 어려워서다. 어쨌든 둘 다 내게는 나은 삶을 위한 숙제일 뿐.
어쩌다 이런 붕괴된 밸런스가 가능한지 생각하다가 여러 가지 변주를 떠올려 보았다.
평생 남의 사진 못 보기 vs 평생 사진 못 찍기.
남의 SNS 못 보기 vs 내 게시글 못 올리기.
평생 스포츠 경기 못 보기 vs 평생 스포츠 못하기.
평생 전시 못 보기 vs 평생 그림 못 그리기.
그러니까 이번 주제는 글방이라면 한 번쯤 나올 수 있는 밸런스 게임이고, 삶의 태도로 확장해 보았을 때 실천 대 경험, 아웃풋 대 인풋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 같았다. 외향인과 내향인처럼, 사람 성질의 두 축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보통 후자를 선호하는 편이다. 또 이것은 시기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책을 정말 많이 읽다 보면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 글만 쓰다 보면 자기 복제의 굴레에 빠지게 될 것이고, 독서가 금지된 상황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생각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만약에 내가 아쉽지 않을 만큼 독서를 하거나 글을 써보았다면 그제야 제대로 된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인데, 이쯤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사명감을 느낄 것 같다. 글을 꼭 써야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창작자의 관점에서, 글은 나에 대해 설명해보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고, 그래서 고유한 시점을 꺼내게 하고, 나에 관한 역사가 된다. 그러나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내가 진정 감사하는 점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 없이, 무언가를 사라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세상이 기억할 수 있게 남겼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조르주 페렉의 책 『공간의 종류들』은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났는데, 인상이 깊어 밑줄을 그어 놓았다.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언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흠,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지금의 나는 더 많이 읽고 더 경험해야 하는 단계이긴 하다. 그리고 다행히 선택할 필요 없이 글 쓰는 연습도 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글방을 다녀보기로 결심한 이유를 되짚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만들어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숙제를 해내는 과정이 버리는 연습장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나는 보통 불행하다고 느낄 때 글을 썼다. 누구에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감정을 배설하는 길이었다. 언젠가 내가 쓴 일기를 하루에 모두 읽어본 적이 있다. 다 읽고 나니 마치 소설 한 편을 읽은 것처럼, 지금의 내 모습이 아주 완성도 있는 결말로 느껴졌다. 무엇이든 아카이브가 된다면 의미가 생긴다.
미술 작가 사사[44]는 먹은 음식 목록, 마신 음료수의 빈 병, 10년 간의 유행가, 모았던 영수증 등 일상의 많은 것들을 수집하는 작업을 한다. 작가의 작업을 보면 사소한 것이 만드는 방대함에 압도된 후, 시간의 밀도라던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통찰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 또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 중 하나임이 틀림 없다. 책을 보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완성하려는 욕심 없이, 덤덤하게 쌓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또 나의 위치를 읽기와 쓰기 사이에서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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