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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산문_타인의 공간_손담비 (24.8.7.) 본문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공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지없이 망가진다. 여기서 공간이란 마음의 공간이다.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좋지만, 그들이 불법으로 체류하는 경우가 있다. 타인의 공간이 되어버린 나는 혼란으로 가득하다. 얼마 전에 하마터면 또 그렇게 될 뻔했다.
이번에는 여행과 야근 때문이었다. 여행과 야근은 반대 개념 같지만, 일상에 균열을 내고, 그 틈을 타 내 마음을 내 것이 아닌 공간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특히 그 두 개가 연달아 있으면 더 힘들어진다. 나는 나의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적용시킬 수 있다. 사소한 방치가 혼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곤도 마리에조차도 여행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매일같이 야근을 한다면, 퇴근 후에는 캔맥주를 사서 소셜 미디어를 뒤적거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에너지를 쓰기 힘들 것이고, 결국 집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시기에 타인은 문이 슬쩍 열리기만 하면 들어오는 여름밤 모기들처럼 나타나 거주한다. 이렇게 최근에 나의 방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의 목록은
나의 무능함을 탓할 동료
나를 미워할 것 같은 직원
나의 가여운 부모님
나보다 열두 살 어린 금메달리스트
“진짜 사랑받는 여자 특징”이나 “이런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에 해당되는 사람
탕후루 챌린지하는 사람
조현아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 아이돌
독서광
스토리에 자기 이야기 너무 많이 올리는 사람
혹은 너무 안 올리는 쿨한 사람의 존재
바디프로필 찍은 사람
친했었는데 연락이 뜸해진 잘 나가는 사람
나 빼고 만난 친구들
애인
전애인
전애인 와이프
전썸남
왠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
내가 취한 걸 본 사람(이내 경기를 일으키며 혼잣말로 욕하기…)
그래도 나는 타인의 공간에서 질식하기 전에 일찍 정신을 차리는 방법을 약간은 터득하게 되었다. 이 리스트는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일단 차단하는 것이 현명하다. 휴대폰을 덮어 입력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어떤 이들은 내가 그들에게 빚진 것의 형태로 거주한다. 이것은 내가 넣고 묵혀둔 냉동실의 음식과 같다. 냉동보관은 마치 유통기한을 영원으로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 옥수수면 집단 식중독 사건’을 통해 음식을 너무 오랫동안 냉동실에 넣어둘 경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답장을 미루다가 씹어버린 DM들
몇 번이나 받지 못한 전화
정산
2주씩이나 빠진 모임에 다시 참석하기 위해 글쓰기
‘고민해 보고 말씀드릴게요’로 끝난 연락
클라이언트도 까먹은 듯 하지만 결국 해야 하는 업무
다음 주에 연락 준다고 약속했던 지인
친구가 부탁한 간단한 일
등이 있다. 이것들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일단 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리스트가 이미 몇 줄을 넘어간 사람은 그저 누워 있기만 할 확률이 크다. 일단은 결심을 한 후 한두 개만 처리하면 된다.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나머지는 아직 무리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집 거실에 놓을 커피 테이블을 제작 중이었는데, 디자이너가 보내주신 시안에 ‘고민해 보고 내일 말씀드릴게요’라고 답장한 후 2주 동안이나 잠수를 탔다. 테이블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아 신중하게 고민을 하고 싶었지만, 매일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방법을 몰랐다. 이대로 제작해 달라고 답장을 보내고 나니 기분이 한결 깨끗해졌다.
그 후에는 어떤 벽을 뚫고 나와야 한다. 제4의 벽? 형이상과 형이하의 벽? 그것은 현실 세상에 있는 내 방에서 타인의 흔적을 치워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약간 마법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의 방과 현실의 방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평행우주 같다. 그것들은 선순환이나 악순환을 한다. 간단한 것부터 시작한다.
지하철 먼지나 더위가 더럽힌 의류를 빨래통에 넣기
얼떨결에 받은 영수증 버리기
맥주캔 찌그러트리기
설거지에 고여있는 물에 다시 물 세게 틀어서 넘치게 하기
고향을 모르겠는 초파리에게 살충제 분사하기
택배박스 뜯어서 접기
나에게서 떠난 머리카락 치우기
이 단계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면 거의 회복이다. 가끔 나는 몸을 일으켰어도 저것들을 해결하는 데에 사흘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따라 부를 줄 아는 노래로만 구성된 플레이리스트나 재미있는 팟캐스트가 큰 도움이 된다. 이제는 다시 나의 공간을 나의 규칙으로 채워 넣을 차례다. 옷을 개서 서랍에 넣고, 설거지도 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다. 샤워도 한다.
타인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 그제야 나는 휴식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보다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절망적이다. 정말이지 다들 이것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환대할 손님으로, 때로는 동반자로 살아가는 법을 알아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집이 아직 원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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