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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10 (4)
성북동 글방 희영수
허리에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둘러싸고 노란 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유명한 덕수궁 와플집 옆으로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달콤한 냄새에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치열하고 침 고이는 광경을 발견한다. 승자들은 따끈한 와플이 든 봉투를 쥐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포근한 날씨에 몸이 풀린 나들이객들이 덕수궁 담벼락 앞에서 한 컷, 노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한 컷, 예쁜 뜨개옷을 부여잡고 한 컷 바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이렇게 다들 길을 막고 서있으면 빨리 미술관으로 갈 수 없다. 사람들을 일렬로 줄 세워 집에 돌려보내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뜨개옷을 두른 가로수 허리를 붙잡고 한쪽 발 끝을 애교스럽게 든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할머..
집에 돌아와 보니 문고리에 종이 가방이 걸려있다. 가방 속엔 새 양말 다섯 켤레가 들어있다. 아마도 자주 마주치는 마을 할머니 중 한 분일 것이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또래 친구는 사귀지 못했지만 매일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하늘 구경하는 할머니들과는 꽤 반가운 사이가 되었다. 내 강아지 란마를 발음하기 어려워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부르는 할머니들. 저번엔 세주네* 할머니가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란마가 어떻게 알콩이가 되었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 그 뒤로는 나도 종종 란마를 알콩이라고 불렀다. 부르다 보니 역시 란마보다는 알콩이가 입에 착 감긴다. 이전 동네에서도 그런 할머니들이 있었다. 집 앞 평상에 매일 식사 시간 전후로 모여 수다를 떨고 마늘을 까고 부침개를 노나 드시던. 그러나..
열여덟 살짜리가 쓴 진로계획서 그 종이 쪼가리 어느 구석에 미래에 대한 구속력이 있었으랴. 사회생활 데이터가 부족한 당시의 상상력으로는 공무원/회사원/선생님/자영업 이외의 직업군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외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결정은 상기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마치 제3세계로 망명하겠다는 선택처럼 비장하면서도 무책임한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 미술학원에 매달 45만 원가량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미지의 미래를 위해 오른쪽 어깨 근육을 혹사하는 동안 어떤 친구는 뜬금없이 발레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뜬금없기로서는 내가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피차일반이었을지 모르나, 아무것도 모르던 고2의 눈에도 발레를 배워 돈을 버는 ..
창 밖으로 내리는 비에는 차가운 악의가 있다. 나무 한 그루라도 주저앉혀야 속이 풀릴 것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따금 무거운 빗줄기가 바람에 떠밀려 꿀렁 휘어진다. 깜짝 놀란 가로등 불빛이 함께 들썩인다. 함께 사는 강아지는 왜 밤 산책이 미뤄지는지 충분히 안내받지 못했다. 답답한 표정으로 발치에서 조바심을 내다가 내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킁킁 코를 묻히며 참견하는 데도 나갈 기미가 없자 풀썩 드러눕는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제습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껐다 켰다. 그야말로 홀로 입사 일주년을 기념하기에 딱인 날씨다. 어쩌다 보니 오늘에 와 있다. 아빠는 내 팔의 문신을 볼 때마다 평생 취직 못 할 거라고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시월로 벌써 입사 일주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