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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단편소설 (6)
성북동 글방 희영수
소음은 염치가 없다. 20년 전 유행가는 기어이 유리문 틈 사이로 비집고 카페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거나 뭔가를 쓰고 있던 사람들이 소음에 귓불을 잡힌 듯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진하는 카운터 안에서 설거지를 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은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남이 듣기에 좋은 소리도 아니고, 자신도 그 소리를 들으면 힘이 쭉 빠지고 만다.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하지 않을뿐더러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러나 이럴 땐 한숨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옆 가게에서 또 음악을 튼 것이다. 그것도 닫힌 문 사이로 가사 한 음절 한 음절이 또렷이 들릴 정도로 크게. 시끄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철 1호선에서 잡상인이 시디..
노바디 홀덤 Nobody hold’em 긴개 딜러는 간신히 하품을 참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카드 두 장씩을 손에 움켜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폴드던 콜이던 상관없으니 빨리 진행하고 싶다. 그러나 딜러에겐 운 나쁘게도 오늘 카지노엔 유난히 손님이 없다. 자기 앞에 앉은 이 두 사람은 이미 게임 진행에는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면 핑계를 대고 눈치라도 줄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크루즈는 천천히 바다를 달리고 있다. 고층 건물만큼 큰 크루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서 바다에 떠있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는다. 지루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딜러는 두 사람 몰래 허벅지를 꼬집었다. 허연이 또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그 감독 작품이 다 뻔하더라고요.” “왜요?” “수직 관계의 시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하품을 했다. 오후의 겨울 햇볕은 부엌까지 깊게 스며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코를 킁킁거리다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 부드러운 방석 위에선 어떻게 누워도 늘어지게 잘 수 있지만, 이런 잠투정이야말로 내 처지의 본분일 테니. 다시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문이 닫힌 작은 방 안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내 쪽이 하품 뒤의 느긋한 눈물 한 방울을 문질러 닦는 동안, 저기선 좌절과 절망, 체념이 콸콸 흐른다. 하여간 드라마를 너무 본 탓이라니까. 넌 아직 내가 겪은 나날의 반에도 미치질 못했는데. 지금부터 이렇게 무너져 내리면 앞으론 어쩌려는 거야. 제 팔자 제가 꼰다던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몰라. 저것도 제 복이다. 나는 눈을 감..
나의 무능한 엄마에게. 엄마. 오늘은 나의 탄생일이다. 당신이 나의 탄생에 중대한 기여함을 감사한다. 인류세 동안 지구를 정복했던 생물인 동물계 포유강 영장목 사람종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이해하여 시간이 물처럼 과거에서 현재, 미래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마음에 든 특정적 사건이 발생하면 사건이 종료된 후라도 그것을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하여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다. 흐르는 시간 위로 여러 번 퍼올릴만한 사건이라면 개체의 탄생일도 그중 하나이다. 탄생일을 기념하는 방법 중 하나로는 자신을 출산한 모체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있다. 감사하다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일이나 말 등의 가치를 언어로 보답하는 인사이자 예의 표시이다. 그 풍습이 마음에 든다. 엄마 대단히 감사하다. 묻기를 희망한다. ..
우파국에서의 첫 일기는 2079년에 쓰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게는 그동안의 일기를 시간 순서대로 꺼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 말고는 달리 가질 수 있는 취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발령 초반의 일기들에서는 당시의 생동하던 감정들- 혼란, 흥분, 걱정 -이 매 장마다 폭발하고 있다. 신체가 젊었던 만큼 마음도 팔팔했다. 그러다 오 년 정도가 흐른 뒤에는 우주 생활에 지쳐 차갑고 건조한 우울이 우세하게 종이를 점령한다. 계약 만료를 일 년 남짓 앞두었을 때는 또다시 발령 초반과 비슷하게 감정이 요동쳤다. 지구로의 복귀를 기대하며 혼란과 흥분, 희망이 매일의 나를 일깨웠다. 결국 복귀하지 못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젊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서재의 동그란 창 밖으로는..
그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길을 잃었다. 어디에 가려던 것인지 아닌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거센 바람이 빗줄기 허리를 감아 휘몰아친다. 흘러내리는 빗물에 힘겹게 눈을 떠도 사방이 어두워 주위를 분간할 수 없다. 소란스러운 어둠에 귀가 먹먹해졌다.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내게 끝이 온다. 내게 곧, 끝이. 눈앞에 투명한 막이 생긴 듯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비좁은 주머니에 온몸이 갇혀 버린다.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빠져나갈 수 없게 몸을 감싸버린 주머니 속에서 그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친다. 주머니는 부드럽고 단호하다. 두려움에 폐가 쪼그라든 그가 헐떡이며 팔다리를 마구 뻗는다. 점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