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글방 희영수

0120 수 / 이전에 참가했던 세 줄 기록 / 긴개 본문

2021-2023 긴개

0120 수 / 이전에 참가했던 세 줄 기록 / 긴개

긴개 2021. 1. 20. 15:36



200118
발터 벤야민이 “언어의 본질은 함께 부분을 나누는 것에 있다.”고 했대. 나는 너에게 간절히 말을 걸고 싶었는데, 그게 뭔가를 나누길 바란 마음인가봐. 반대로 너는 나와 말하고 싶지 않을까 두려워. 네가 나와 뭘 나누고 싶겠어.



200119
감정은 불멸. 무로 돌아가는 경우가 없다. 잠시 잊고 있던 감정은 실은 동면 중. 녹아 타들어가 재라도 남아.



200120
나를 잊어줘. 나는 잊어줘. 나만 잊어줘.



200121
작은 잔 6개. 소년소녀가 손을 잡고 서있다. 오렌지 머리칼에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두 개씩 같은 그림이 있다. 풀밭엔 작은 할미꽃이 피었다.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기도 하고, 소녀가 소년을 바라보기도 한다.



200122
오전 9시에 일어나 공복을 즐긴다. 공복을 고결한 자세로 여길 때도 있었다. 배부른 사람의 웃음엔 항상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식사와 간식을 모두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뱃 속이 비워져야 당장 해야할 일들의 우선순위가 빠르게 정리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고양이의 공복은 응급 상황. 스탈린이 환생한 고양이라해도 하루 한 번 간식을.



200123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
아침에 잠들기 시작하면
하루가 무겁게 뒤틀려 지옥이 된다.
보일러 요금 때문에 아침엔 난방을 외출로 돌린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뒷덜미가 서늘하다.
서둘러 고양이가 깔고 있던 전기 방석을 뺏어온다.
엉덩이 아래가 뜨끈하다.
뒷덜미는 이따금 서늘하다.
하루를 곧바로 펴기 위해 일찍 일어났는데
엉덩이 아래가 뜨끈하면
게다가 아이패드 화면에 장작 타는 ASMR을 틀어두면
도로 꿈과 현실이 뒤섞인다.
말짱 도루묵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책장에서 탐욕스럽게 뽑아온 책 두세 권 펼쳐 놓고
반쯤 희미해져
처음의 의도는 온데간데 없는
그런 아침이 3일째
어쩌면
이런 태도는 꽤 용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잔의 커피를 빈 속에 부었으니
욕 먹을 만한 시를 몇 개 따라 썼으니
오늘 아침을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200125
닿지 않는 대상을 열망하려니 지겹고 처량하네. 예를 들면 적당한 두께와 표면이 만든 그 선들, 작은 세계에 담을 두르는 웃음들, 영원히 어떤 순간에 머무르는 사람들. 그렇지만 손에 닿는 것들은 이미 가졌는걸. 이미 가진 걸 매순간 소중히 여기는 새끼가 없기 때문에 세상 모든 희비극이 쓰이지 않았나. 집착과 공상이 내 고질병. 이것이 널 두렵게 할까 입을 다문다. 닥쳐야 하는데.



200126
의도는 화살의 방향. 결과는 과녁에 꽂힌 자국. 화살과 불꽃, 설산에는 사람의 눈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이 있다. 의도는 불씨의 위치. 결과는 타고 남은 재. 의도는 눈이 뭉치기 시작하는 온도. 결과는 검게 녹아 버린 물. 찰나를 떼어놓기 위해 만드는 허상들.



200127
50키로 거울

다행이다
썩은 속은
내게만 열려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만약
상점 유리벽처럼
훤히 들여다 보였다면
죄 있는 자라도
내게 돌 던졌을걸
열등감과 욕망, 얍삽함이
거울 뒷면에 더덕더덕 붙어서
행복해
반대였다면
도망가는 너희들
뒷모습만 바라봤을걸
누구 뒤통수에
돌 던지려다가
멈칫하는 것도
그 때문
욱 하려다가
바람 빠지는 것도
그 때문



200128
이쯤 되고 보니, 누군가와 친밀해 지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 없다. 갑자기 바닥이 꺼지고 전염병이 돈다. 그럼에도 너와 친해지는 것이 가장 불가능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