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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글방 희영수
0220 토 /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 이미지의 삶과 사랑』, 제1장 바이탈 사인/복제 테러 / 긴개 본문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 이미지의 삶과 사랑』, W.J.T. 미첼 지음/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6.
격주 목요일마다 만나는 독서토론회의 두 번째 책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는 무려 528페이지짜리의 두꺼운 책으로 가격도 29,000원이다. 돈 아까워서 술담배도 안 하는 백수한테는 비싸! 게다가 졸라 어렵다. 배경지식 없는 사람은 미술비평 이전에 백과사전 뒤지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그래도 백수는 읽는다. 백수에겐 이런 어려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책은 1부 이미지 / 2부 대상 / 3부 매체로 나뉘어 있다. 2월 19일에는 1부 제1장 바이탈 사인/복제 테러 p.20-51를 읽었다. 1부 '이미지'에서는 이미지라는 모호한 단어를 기호학의 관점이 아닌 그것이 가진 일종의 자생성에 초점을 두고 이미지의 생명과 이미지의 삶, 우리의 욕망, 이미지를 과대·소평가하는 가치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미지가 전부다." -안드레 애거시, 캐논 카메라 광고에서
바이탈 사인
미첼은 1994년에 출간한 『그림이론 Picture Theory』에서 '그림의 전환 pictorial turn'이라는 관념을 진단하려고 했다. '그림의 전환'이란 시각 이미지가 언어 대신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표현 양식이 되었다는 관념으로 미첼은 이에 저항하고 기존 이론에 근거하여 진단하는 대신 그림 자체를 이론화의 형식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에 『그림이론』을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로 발전시키며 이미지의 삶을 탐구하는 글들을 새로 써 모았다. 이 책에서는 '이미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형태의 생명력과 활기animation, 즉 그림을 '바이탈 사인vital sign'으로 만드는 행위성agency, 동기, 자율성, 아우라, 창조력 등의 징후들symptoms을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이탈 사인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기호'를 말한다.
우리는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는 이미지가 가진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끼치는 영향, 스스로 복제되고 변형되는 동안 그 영향력은 점점 더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퍼지는 것처럼 여기면서도 논쟁 속에서나 비평의 태도를 취할 때는 그림은 그림일 뿐이며 그것의 생명은 활용하는 주체에게 달려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왜 사람들은 이미지가 가진 힘에 대해 실제로 느낀 것과 그것에 대해 말할 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가. 이런 '이중의식double consciousness'에 대한 의문에서 제1장이 전개된다.
이미지의 생명력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원시인이거나 아이들, 대중일 수 있으며 야생적 사고, 비서구적이자 전근대적 사고, 신경증적 혹은 유아적 사고, 대중적 사고에서 이러한 마법적 믿음이 기반한다고 여겨버린다. 그와 반대로 '나'는 언제나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 과연 그럴까? 이미지에 대한 역설적인 이중의식은 현대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이는 여전히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우상파괴주의iconoclasm'로서의 비평'(자신의 작업을 잘못된 이미지를 탈신화화하고 교육적 측면에서 폭로하는 우상파괴적 실천으로 제시하려 하는 비평의 불가피한 성향)이야말로 '이미지의 삶에 대한 징후'가 될 수 있다. 미첼은 그와 반대로 제3의 비평을 추구한다. 1. 이미지와 재현을 넘어서기를 꿈꾸지 않는 비평양식, 2. 우리를 현혹하는 잘못된 이미지를 타파하기를 꿈꾸지 않는 비평양식, 3. 올바른 이미지와 잘못된 이미지를 명확하게 분리하지 않는 비평양식이 그것이다.
기호학으로 의미에 저항하려는 이미지를 정복하고 '재현=부활'로 이어지는 '삶/생명에 대한 신비적인 개념'을 탈신비화하고자 했던 롤랑 바르트는 당시 "여론은 ······ 이미지를 의미에 저항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모호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 '삶/생명'이라는 다소 신비적인 개념의 미명하에서 그러하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이미지는 다시 현현하는 것representation, 즉 궁극적으로는 부활이다"고 말한다. 그랬던 롤랑 바르트도 푼크툼이 스투디움을 압도하는 경험에 비평으로 이미지의 신비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미첼의 미술사 동료 한 명(Tom Cummins)도 '그림과 그것이 재현하는 것 사이의 마법적 관계에 대한 관념을 비웃는 학생들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찍은 다음 두 눈을 도려내라고 시켜'본다. 우리는 이미지가 아무런 힘 없는 종이 쪼가리이거나 플라톤처럼 그저 모방일 뿐이라며 그 영향력을 최대한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려고 하지만 눈사람을 부수는 익명의 폭력에게 분노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미첼은 이미지의 힘이나 의미보다 욕망의 문제로 분석하고자 한다. 해석학과 기호학이 박박 긁어낸 이미지 연구는 여전히 미첼이 제기하는 '이미지의 역설적인 이중의식'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이미지는 살아 있지만 또한 죽어 있다는 것을, 이미지는 강력하지만 또한 나약하다는 것을, 이미지는 유의미지하지만 또한 무의미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이미지가 가진 욕망에 대한 질문이 이러한 문제 제기의 방향에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욕망에 대해 물음으로써 그림에 '생명과 힘과 욕망'을 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유기체로서의 이미지'라는 개념은 단지 은유이지만, 비하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미첼은 '살아 있는 이미지'를 1. 언어적인 동시에 시각적인 비유trope이며, 2. 말의 형상figure of speech(전의trope를 검색하면 '한 단어의 정확한 고유한 의미가 아닌 의미를 취하는 것으로 은유metapho, 환유metonymy, 규범에서 일탈하는 문채이며 말의 비유figure of speech'라고 나오던데 2와 이어지는 듯)이자, 3. 시각vision의 형상, 4. 그림 도안의 형상, 5. 사유의 형상으로 보며 6. 이미지들의 이차적이고 반성적인 이미지 즉 메타그림metapicture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유비의 한계와 '삶/생명'의 의미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해보자.
복제 테러
그러니까, 이 책은 '이미지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는 단순한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하고 있다. Michael Thompson(p.29 각주에서)이 생명형식life-form이 가진 논리적 지위 덕에 생명 술어life-predicate를 이미지와 같이 살아 있지 않은 것들에 적용하는 것을 허용해준다고 말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욕망을 소유한다는 것도 허용되고 있다.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연속적인 의문들이 있다. '만일 '살아 있는 이미지'나 '살아 움직이는animated 도상'이라는 현상이 인류학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고 이미지 자체의 근본적 존재론이 가진 특징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것은 하필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현대에 와서) 이토록 강력하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인가? 만일 살아 있는 이미지가 늘 이중의식, 즉 믿음과 동시에 부인의 주제였다면, 오늘날 어떤 조건이 이러한 부인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왜 다양한 형태의 '우상충돌iconoclash', 즉 이미지 전쟁이 우리 시대의 그림의 전환(p.5 하이데거가 말한 '상으로 생각되고 파악되는 세계'를 미첼은 pictorial turn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으로서의-세계world-as-picture'를 넘어서고자 했다.)에 두드러진 부분으로 보이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이미지 생성과 파괴가 주는 불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현대의 기념비적인 두 이미지로 논의하고자 한다. 하나는 복제양 돌리의 사진이고 또 하나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파괴된 순간의 사진이다.
돌리는 유전공학의 비인간적이고 찬란한 미래의 양면을 모두 암시하는 전 지구적 아이콘이 된 복제 생물이고 쌍둥이빌딩의 폭파는 '테러리즘과 이에 맞서는 전쟁'이라는 전세계적 질서를 새롭게 세웠다. 이 이미지들은 단순히 그 시대에만 통용되는 화제가 아니었으며 그 여파가 이어질 불안정하고 공포스러운 미래를 암시했다. 돌리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부활과 불멸,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꿈을 마침내 성공시킨 상징이었다. 돌리는 단순한 기계적 복사물이 아닌 실제 양의 들뢰즈적 시뮬라크르simulacre인 복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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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계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 독파하셨나요? semiotique symbolique chora 개념 잘 이해가 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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