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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국화는 기역과 히읗 / 긴개 231216 본문
소음은 염치가 없다. 20년 전 유행가는 기어이 유리문 틈 사이로 비집고 카페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거나 뭔가를 쓰고 있던 사람들이 소음에 귓불을 잡힌 듯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진하는 카운터 안에서 설거지를 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숨은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남이 듣기에 좋은 소리도 아니고, 자신도 그 소리를 들으면 힘이 쭉 빠지고 만다.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하지 않을뿐더러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러나 이럴 땐 한숨 말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옆 가게에서 또 음악을 튼 것이다. 그것도 닫힌 문 사이로 가사 한 음절 한 음절이 또렷이 들릴 정도로 크게. 시끄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철 1호선에서 잡상인이 시디플레이어로 틀어주던 애절한 팝송과 진하가 태어날 때쯤 유행했던 가요 같이 전혀 반갑지 않은 노래만 골라 틀고 있다. 더욱 괴로운 점은, 노래를 한 곡 듣다 말고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꾸만 다른 노래로 바꿔 트는 바람에 그마저도 한 곡을 온전히 끝까지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숨소리처럼 존재해도 듣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노래가 느닷없이 툭 끊기고 잠시 정적이 흐르다 또 새로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바람에 한 곡 한 곡 귀 기울이게 된다. 벌써 몇 주째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진하는 집으로 걸어가다 말고 저도 모르게 낮에 들었던 촌스러운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주위를 홱 돌아보았고, 울컥 화가 나서 또 한숨을 길게 쉬었다.
진하의 카페 옆에는 원래 철물점이 있었다. 진하는 이왕이면 카페의 예쁜 외관과 어울리는 귀여운 소품가게라던지 요깃거리 할 수 있는 분식집이 이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렴한 월세 자리를 찾느라 진을 빼고 나니 낡고 허름한 철물점 이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 요긴하게 덕을 볼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랬다. 카운터에 물이 나오지 않아 허둥대는 진하를 철물점 할아버지가 도와준 적도 있다. 그는 몽키스패너로 카페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고무패킹이 찢어졌다며 새로 갈아주었다. 진하가 감사해 돈을 드리겠다고 해도 고무 그거 몇백 원 안 하는 거라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뒤로 진하는 카페에서 팔다 남은 스콘 등을 두어 번 가져다 드렸다. 그는 그런 거 안 먹는다며 거절했지만 딸기 라떼는 군말 없이 받아 들었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하는 정도로 아는 체하는, 대화를 더 나누지는 않지만 불편할 것은 없는 적당히 이상적인 거리였다.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유리창에 붙어 있던 빛바랜 시트지가 전부 떼어지고 ‘대혁철물’ 간판이 리어카에 실려갔다. 그러더니 ‘수영화원’ 간판이 덜컥 외벽에 달리고 철물점이 있던 자리엔 꽃집이 들어섰다. 칙칙한 철물점보단 꽃집이 카페와 더 어울리겠다며 진하는 내심 기뻐했다.
며칠 뒤 출근하던 진하는 카페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안을 들여다보는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오픈 시간까지는 이십 분이 남아있었다. 의아해하며 진하는 서둘러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카페를 찾아오셨나요? 영업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시겠어요?”
여자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눈 아래가 퀭한 얼굴로 육십 대 초반은 되어 보였다. 그는 진하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는 진하의 얼굴 구석구석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진하는 오싹한 기분을 숨기며 애써 웃었다.
“저희 영업은 오전 9시부터라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거 어때요?”
“네?”
여자는 느닷없이 꽃집의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때요?”
“뭐가 어떻다는 말씀이시죠?”
“간판이 어떠냐구요.”
진하는 잠시 가만히 간판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꽃집 사장님인가? 잘 지내두면 앞으로 나쁠 것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좋은 인상을 남겨보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진하가 입을 열었다.
“어, 선이 아주 선명하고.. 또 색이 밝아서요, 멀리서도 잘 보일 것 같아요. 예뻐요!”
“또 어떤데요?”
“네?”
“이 글자는 어때요?”
진하는 도무지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왕 잘해보기로 다짐했으니 좀 더 성의를 보이자며 또 간판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체 했다.
“음, 이 ‘수영’이 밝은 노랑이고 ‘화원’이 초록이라 간판에서부터 벌써 노란 국화가 떠오르는 것 같아요. 꽃집 간판으로 딱이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여자는 진하의 말이 끝나자 고맙다는 말도 없이 꽃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듯해 진하는 재빨리 카페로 들어갔다. 찬 물을 따라 몇 잔 마시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영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꽃집 여자는 몇 번이고 더 그렇게 진하의 목덜미에 오소소 닭살이 돋게 만들었다. 진하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엄마와 통화를 할 때였다. 최근의 이런저런 일들을 전하고 또 듣느라 정신없이 떠들고 있었는데, 카페의 열린 창틈으로 희끗희끗한 정수리가 보였다. 정수리는 그대로 유리창을 지나쳐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계속 붙어있었다. 진하가 놀라 목소리를 줄이니 그제야 정수리는 천천히 옆으로 사라졌다. 엄마에게 꽃집 간판 이야기 한 것을 엿들었을까, 진하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갑자기 여자가 카페로 들이닥친 일도 있었다. 여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대뜸 니가 경찰에 신고를 했느냐며 진하에게 삿대질을 했다. 당황한 진하가 손을 내저으며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어도 여자는 웅얼웅얼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댔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단골손님 한 명이 영웅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진하를 감싸는 말을 하고, 또 다른 손님들도 이상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자 그는 쪽수에 밀려 단념한 것인지, 혹은 진하의 표정에서 거짓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중얼거리다 말고 꽃집으로 돌아갔다. 카페가 조용해지자 진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스콘을 하나씩 돌렸다.
날이 갈수록 꽃집은 끔찍한 존재가 되어갔다. 진하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겁이 났다. 카페는 메뉴판 디자인부터 테이블 의자까지 전부 그가 열심히 고르고 준비했다. 되도록 오래 영업하며 자리를 지키고 싶다. 그러나 저 꽃집 옆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 여자가 나가준다면 제일 좋겠으나 택도 없는 희망이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조언을 구해도 미친 사람한테 괜히 코 꿰이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진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저렇게 노래를 크게 틀어 자신의 가게 내부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지 않은가. 꽃집 여자에게 말을 꺼낸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 그 이후 사이가 더 나빠지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정 효과가 있다는 카모마일 티를 아무리 달여 마셔도 화장실만 들락거릴 뿐이었다.
비가 투두둑 차양막을 때리는 소리에 진하는 카운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우산꽂이를 꺼냈다. 카페 입구에 우산꽂이를 내려놓는 진하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게 안 돼.”
“예?!”
꽃집 여자가 손에 검은색 칠판과 마카펜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직원한테 다 물어보고 샀는데 이게 안 나와.”
“뭐가 안 나온다는...”
“이것 봐.”
그러더니 대뜸 진하의 손에 마카펜을 들려주었다. 진하는 이제 이 상황이 웃기기까지 했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받아 든 마카펜의 뚜껑을 열고 살펴보니 노란색 잉크가 펜촉에 다 스며들지 않아 하얀 상태였다.
“이거 여기 쓰여있는데요. 펜을 잘 흔들고 꾹꾹 끝을 눌러주면 잉크가 배어 나온다고요. 이대로 해보셨어요?”
여자가 또 웅얼거렸다. 진하는 카운터로 들어가 쓰다 남은 메모지를 꺼냈다.
“이렇게 여러 번 꾹꾹 누르면 보세요, 잉크가 이제 다 찼죠? 잘 나와요.”
진하를 얌전히 따라온 여자는 가만히 서 있더니 또 입을 열었다.
“수영화원. 거기다 예쁘게 써봐.”
뭐라 대꾸를 하려다 말고 진하는 그에게서 얌전히 칠판을 받아 들었다. 양쪽엔 노란 꽃까지 그려가며 천천히 정성 들여 ‘수영화원’을 썼다. 꽃집 여자에게 칠판을 돌려주니 썩 만족한 표정이었다.
“우리도 이런 노란 국화가 있는데.”
“어, 그거 예쁘겠네요! 저 보고 싶어요!”
진하는 꽃집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카페를 나와 수영화원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풀내음이 코 끝에 훅 끼쳤다. 이리저리 꽃집 안을 둘러보던 진하는 작은 테이블 위에서 연필 한 자루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넓게 펼쳐진 커다란 책에는 쓰다 만 삐뚤빼뚤한 자음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ㄱ, ㄴ, ㄷ, ㄹ….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런 책을 본 것 같았다. 꽃집 여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진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책을 못 본 척했다. 그리고는 노란 꽃이 피어있는 작은 화분을 집어 들었다. 그 사이 여자는 책을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이 꽃 너무 예뻐요. 이거 하나 주세요. 얼마예요?”
꽃집 여자는 잠시 당황한 듯 화분을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이거 아끼는 꽃인데, 국화과인데, 삼만 원에 줄게요.”
아닌 게 아니라 꽃은 정말 예뻤다. 국화과 특유의 톱니 같은 잎에는 은빛이 돌았고 투명한 듯 노란 꽃잎에 코를 가까이 대면 향긋했다. 여자는 서툴게 카드결제기를 켜고 카드를 이리저리 긁으며 씨름을 했다. 진하는 이참에 화분이나 많이 들여놓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느긋하게 여자를 기다리며 식물들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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